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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봄 Feb 09. 2022

35. 옷깃만 스쳐도 인연

따뜻한 마음이 그리워지는 가을입니다. 제법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가을 오후에는 눈빛이 선한 사람과 마주앉아 잔뜩 여유를 부리며 차 한 잔을 마실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피천득 선생은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도 몰라보고, 보통 사람은 인연인줄 알면서도 놓치고, 현명한 사람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을 살려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시간이 갈수록 인연이라 생각하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으니 나는 어쩌면 인연을 만나도 몰라보는 어리석은 사람 축에 속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오늘도 새로운 얼굴들을 만나 악수하고 명함을 나누었습니다. 어제도 새로운 얼굴들을 만나 명함을 건네며 악수를 했고, 내일을 기약하기 어려워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내일도 어제나 오늘처럼 새로운 얼굴들을 만나 명함을 건네고 악수를 하게 될 겁니다.           

그러나 짧은 시간 얼굴을 마주하고 돌아선 우리는 아마 서로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겠지요. 서로 손까지 맞잡고 악수를 했지만 내 손바닥은 그 사람의 체온을 기억하지 못할 테고 그 사람 역시 그럴 겁니다. 가장 오래 내 곁에 남아있는 것은 종이 위에 적힌 이름 석 자와 그 사람의 현재 모습을 짐작케 하는 명함뿐입니다. 나는 습관처럼 명함에 적힌 전화번호를 내 휴대폰에 옮기고 그때부터 그 사람은 의미 없이 내 삶 속으로 침투해 똬리를 틀고 가만히 침잠해 있을 뿐입니다. 아마 내가 외로울 때 아무리 이름을 불러도 대답하지 않는 이름들로 분류되어 있겠지요.          

고등학교에 다니던 무렵, 난 늘 혼자 늦은 시간까지 학교 벤치에 앉아 운동장 너머로 지나다니는 차들의 불빛을 멍하니 바라보곤 했습니다. 그리고 저 많은 차들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저 차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디서 무얼 하며 살고 있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들을 이어갔습니다. 아마도 일찍 철들어버린 그때, 친구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이 내게 남아있었겠구나 생각하지만 그 버릇은 지금도 여전히 남아 저 멀리 도로를 지나가는 불빛들을 바라볼 때면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에 휩싸이곤 합니다. 그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지금은 저렇게 무심히 지나는 불빛들도 나와 전혀 무관하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쩌면 그때의 막연한 바라봄과 지금의 바라봄은 전혀 다른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언젠가부터 사람이나 사물을 그저 쉽게 지나쳐 보지 않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는 대중가요 가사가 가슴에 맺히는 나이가 되어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어떤 사소한 것들도 지금의 나와 무관하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은 어제보다 오늘 점점 더 깊어지고 아마 내일이면 오늘보다 조금 더 깊어 있을 겁니다.          

불가에서는 한 번의 옷깃만 스쳐도 삼천겁의 인연이 있는 거라는데 그 말대로라면 늘 함께 얼굴을 대하고 때로 활짝 웃어주기까지 하는 우리는 대체 얼마의 인연이 있는 걸까요. 이 거대한 우주, 그 안에 지구, 그 안에 대한민국이라는 작은 나라, 그 안에 평택이라는 도시, 그 안에서도 현 시점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그 많은 인구 중에 서로 만날 수 있는 확률은 과연 얼마나 될까요. 오늘 인연으로 마주하게 된 우리는 서로에게 얼마나 귀한 존재로 기억되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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