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습니다. ‘마음’ 말입니다. 시인 정지용은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밖에”라며 차마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을 시로 표현하지만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이 마음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안절부절못하고 괴로울 때가 많습니다.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불행한 것 같고, 기쁘다고 생각하면 어느새 세상 모든 슬픔은 왜 전부 내게 모여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고, 사랑과 미움이 교차하고,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고, 분노와 용서가 교차하고, 선과 악이 교차하니 이 변화무쌍한 마음의 정체를 알 수만 있다면 인생이 조금은 행복해질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옛말처럼 내 안에 들어 있는 내 마음조차 알 수 없는데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이야 더 말해 무엇 할까요. 그래서 철학자들은 보이지 않는 내면세계에 관심을 갖고 그렇게도 열심히 이 보이지 않는 것을 증명해내려고 노력했겠지요.
철학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로 보이지 않는 생각을 존재의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렸고 한참 후일에 니체는 ‘나는 살아있다, 고로 생각한다’는 말로 생각보다 실존을 우선에 두긴 했지만 이들에게도 여전히 보이지 않는 내면, 즉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이 어렵기는 우리와 마찬가지였구나 싶어 조금은 위안도 됩니다.
보이지 않는 마음으로 인해 하루에도 몇 번씩 인생의 희로애락을 경험한다는 걸 생각하면 이 마음 다스리는 일이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예부터 현자들은 자신의 마음 다스리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생각하고 밤낮으로 수행에 힘썼다는데 그건 마음 다스리는 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어렵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겁니다.
꽃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그 꽃을 보는 사람의 내면이 아름답기 때문이라는 당신의 말은 옳은 것 같습니다. 꽃은 눈을 통해 인지되고, 마음속에 담겨 있는 많은 것들과 어우러진 뒤에야 비로소 그 아름다움을 확인하게 되는 법이니까요. 어제 본 꽃이 오늘따라 유난히 아름다워 보일 수도 있고, 그저 그렇게 보일 수도 있고, 오히려 슬퍼 보일 수도 있는 것은 그 꽃이 바로 내 마음 어느 한 지점에 가 닿아 있기 때문일 겁니다.
사람들은 자주 세상이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그 말은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조금 살만하게 느껴지는 것은 내 마음을 조금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돌려놓았기 때문입니다.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에는 그것을 이겨내는 것도 가득 차 있음을 그제야 보게 될 테니까요.
그러니 오늘 우리가 느낄 행복의 분량은 어쩌면 오늘 하루 내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횟수만큼으로 정해져 있는 건 아닌지, 내 마음을 조금 더 많이 들여다보고 조금 더 행복한 순간들을 떠올리면 우린 어제보다 조금 더 행복에 가까이 가 있지는 않을지, 이 저녁 잠시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