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게 너무 많아서 계속하고 싶다.
나는 서울 태생에 초중고와 대학을 서울에서 다녔고 시골살이가 하고 싶거나 텃밭을 가꾸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런 내가 공동체살이 10년이라니!
처음에는 여행지 게스트하우스에서 모르는 사람끼리 불멍 하듯이 모여 노는 것 같다가 점점 재밌어지고 깊어졌다. 같이 놀러 다니고 마음을 얘기하고.
이것은 우리 동네사람들- 우동사에서 초기에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 밥상모임이라서 그랬다.
밥상모임은 매주 집집마다 큰 테이블에 앉아서 근황 나누기 마음 나누기를 하는 것이다.
쓰다 보니.. 좋을 때는 인터뷰 많이 해서 그냥 신문기사나 다큐에 나온 게 전부인 거 같다. ㅎ
그냥 내가 좋았던 것은 한 빌라에 모여 살다 보니 문을 잠그지 않고 살게 되었다는 것. 서울 부모님 집에서는 문 밖에서 덜그럭 소리가 나면 게다가 남자가 서있으면 누군가? 싶은 두려운 맘이 드는데 우동사에서는 아는 사람들이거나 아는 사람의 친구들뿐. 우체국 아저씨도 우리가 다 같이 산다는 걸 알아서 내게 2층 3층 우편물을 전달하라고 다 같이 주셨다.
태어나서 아파트에서만 살았던 내게는 “동네”의 느슨한 그러나 안전한 넉넉함이 좋았다. 아래 윗집으로 먹을 거 주러 왔다 갔다 하고 당근마켓 이전에 나눔 방이 활성화되었다.
밥 한 그릇 푸러 왔다 눌러앉아 놀거나 수다를 떨거나. 우리 동네사람들- 이 빌라 안에서 많은 정서적 충족감을 얻었다.
외동인 나에게는 또래집단이 많은 활기가 즐거웠다. 이렇게 모여 사는 게 좋다가 각자의 공간, 생애 주기에 따라 결혼으로 각 가정의 집으로 변화하는 게 4.7년이 걸린다고 한다. 우리도 그렇게 헤쳐 모여 살다가 애즈원 공동체(이놈의 애즈원 공동체! 망할 ㅠㅠ)에서 느낀 것처럼 마음 나는 만큼, 친한 친구랑 살고 싶다가 나오면서 정해진 대로 가 아니라 가족끼리, 애즈원 공동체 공부 열심히 하는 사람끼리 모여볼까? 하면서 분위기가 변하기 시작했다.
균열이라기엔 이상하고.. 점점 “우리”라는 벽이 더 잘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상한 마음인데 우리를 지키고 싶고 소중히 하겠다는 마음이 남과 나를 가르고 남을 배제하고 싶어 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지금은 이런 부분을 알고 실패를 교훈 삼아서 다시 커뮤니티를 재정립하고 싶다. 이렇게 모여 사는 재미를 만끽했는데 노년까지 그 재미를 갖고 가고 싶고 행복한 순간이 훨씬 많아서. 그냥 도시의 한 개인으로는 심심해서 못 살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