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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기어다니는 거미인 줄 알았다

땅거미

by FreedWriter

처음 “땅거미”라는 글감을 받았을 때, 솔직히 머릿속에 번뜩 떠오른 건 다름 아닌, 가수 박효신 님의 눈의 꽃 첫 가사였다.


“어느새 길어진 그림자를 따라서~ 땅거미 진 어둠 속을 그대와 걷고 있네요~”


아마, 같은 동시대를 살고 있는 나와 비슷한 분들은 대부분이지 않을까?


그때 나는 ‘땅거미’라는 단어를 정확히 몰랐다. 그냥 가사를 흘려듣던 시절이었으니 진짜로 땅 위를 기어다니는 거미라고만 생각했다. 내 국어 실력이 이 정도였구나, 참담하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덕분에 노래는 애절하게 들었지만, 머릿속에는 괜히 곤충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듯한 기묘한 장면이 생각나곤 했다.


그래서 오늘도 사전을 찾아본다.


‘해가 지기 어스름해질 무렵의 어둠’


아, 이제야 가사 속 그림자가 선명해진다. 단순히 밤이 아니라, 하루의 끝과 밤의 시작이 만나는 경계. 그 애매모호하면서도 아련한 시간대를 표현한 단어였다니. 우리나라 단어는 이런 미묘한 순간까지 딱 맞는 단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세종대왕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인생도 땅거미 같은 순간이 많은 듯하다.

낮처럼 모든 것이 환히 보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깜깜한 밤도 아닌 시간. 뭔가 불안하고 애매해서 한 발자국 내딛기가 조심스러운 때. 계절에 따라 퇴근해야 하는 시간이기도 하는 설렘과 퇴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때.


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 잠시 멈추어 서면, 오히려 낮에는 보지 못한 빛들이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가로등 불빛, 창가의 작은 등불, 아직 꺼지지 않은 사무실의 형광등. 임무 완수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내 안에 꺼지지 않는 열정 같은 것 들이 말이다. 퇴근을 앞둔 나의 모습이 아닌, 야근을 위해 새로운 시작을 준비해야 한다는 정확히 반대되는 상황인지 모르겠지만.


초보 작가인 나는 글을 쓸 때마다 땅거미 속을 걷는 기분이 든다. 제대로 쓰고 있는 건가, 이 글이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울림을 주는 마음에 닿을까. 어둠인지 빛인지 구분되지 않는 불안 속에서 사브작 사브작 한 걸음씩 발걸음을 옮긴다. 조심스럽게 내 딛은 그 한 걸음이 나를 조금 더 성장하게 만드는 시간이라는 사실을 믿으면서.


유능한 작가님을 만나면서 내 안에 감춰있던 땅 위를 기어다닌 거미 대신, 하루의 끝과 시작이 겹쳐지는 아름다운 순간으로 만들어주셔서 책을 한 권 출간하게 되었다. 단독 저서는 아니지만, 함께 노력해서 출간한 잊지 못할 순간이 떠오른다.


나도 언젠가, 내 글이 누군가의 땅거미 속을 함께 걸어주는 작은 불빛이 되어 주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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