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소원은 이미 이루어졌다고 한다
공주가 학교에서 소원등을 만들어 왔다. 종이컵 안에 작은 전기초를 넣어 만든 야매 소원등이었다. 그래서 공주의 소원은?
우리 가족 행복하게 해 주세요.
아이가 쓴 저 "우리 가족"에는 분명히 아빠도 포함됐겠지? 양치하는 내 앞으로 소원등에 불을 밝혀 내밀어 보이는 공주에게 나는 좋은 소원이라고, 등이 아주 예쁘다고 말해 줬다. 그리고 덧붙였다. 주말에 아빠한테도 보여 주라고, 아빠도 예쁘다고 하겠다고.
그 말에 누나만 칭찬 받는 꼴을 눈 뜨고 보지 못하는 왕자가 그거 어떻게 만들었는지 물었고, 둘이서 재잘재잘 대체할 재료와 방법 의논하는 소리를 들으며 흐뭇하게 세수까지 마치고 나오자 왕자가 다가와 말했다.
"엄마, 나는 소원이 세 개가 있는데, 하나는 부자가 되는 거고, 또 하나는 누나랑 안 싸우는 거야."
"야, 그 소원은 이루어질 수 없어!ㅎㅎ 너랑 나는 매일 싸우잖아!"
공주가 끼어들며 외치자 왕자가 아차차 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제 손바닥으로 이마를 툭 치고는 세 번째 소원을 얘기했다.
"그리고 마지막은, 아빠랑,"
그러더니 잠시 멈칫하던 꼬마 왕자. 또 아빠랑 엄마랑 같이 있는 게 보고 싶다는 뻔한 소원을 말하려나 싶어서 이제 미안하지도 않으려는데 왕자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나 아빠랑 엄마랑 싸우는 거 안 보고 싶어.
따로 산 지 반 년이 되었는데 여태 그걸 기억하다니. 엄마랑 아빠가 싸우는 걸 좀처럼 못 보고 자란 나는 왕자의 그 말을 통해 부모의 다툼을 목격하는 충격의 크기와 무게를 짐작해 보았다. 생계와 살림, 육아를 도맡아서 힘들다고 느낄 때도 솔직히 많았는데, 갈등과 긴장이 있는 상태보다는 이혼이 낫다던 변호사님 얘기가 정말로 옳았구나 싶었다.
이혼이 슬슬 지겨울 법 하다가도 화들짝 놀랄 일이 또 생기는 게 매번 신기하지만, 아이를 조금이나마 안심시켜 주고 싶어서 엄마랑 아빠랑 이제 안 싸우잖아, 한참 됐는데? 그치? 하며 로션을 발랐다. 그러자 거울 속 왕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멋쩍게 미소를 지었다. 내 이혼이 가져다 준 요상한 미소를.
"왕자 소원 하나는 벌써 이루어졌네?"
꼬마가 그런 뜻으로 소원을 말하진 않았을 텐데, 오늘은 혼자 일하고 살림도 하는 엄마의 하루가 유난히 고되어 그냥 그렇게 상황을 넘겼다. 공주 친구네 엄마랑 같이 저녁 산책 하며 남편 없는 여자인 티를 안 내느라 조금 지쳤나 보다.
(이미지 출처=Just Artifac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