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명상가나 영성가가 아니다. 하지만 명상에 관심을 가지고 명상을 꾸준히 하려 하는 한 사람으로 나의 명상에 관한 지극히 단편적이며 개인적인 이해를 기록해 놓고자 한다.
여러 스승들은 명상을 '지금 여기에 깨어있음'이라 말한다. 또한 명상의 궁극의 목적은 괴로움(苦)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도 한다. 깨어있음은 무엇이고 명상은 어떻게 우리를 괴로움에서 구하는가?
연속된 개체의 반응은 경향성을 지닌다.
나는 생오이를 못 먹는다. 언제부터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머릿속에 생오이를 떠올리기만 하여도 왠지 코 끝에 그 냄새가 나는 듯하고 입 안에 그 맛이 나는 듯하다. 이유를 따지기도 전에 나는 오이가 싫다. 왜 그럴까? 오이라는 대상을 마주하는 순간 내 안에 과거의 경험에서 입력되어진 싫다라는 반응이 습관적으로 튀어 나오기 때문이다.
습관적인 반응은 '나'라는 개체가 연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꿈 속에서 나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알엠도 마동석도 된다. 어떤 이는 낮잠을 자는 동안 나비가 되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눈을 뜨면 여지 없이 잠들기 전의 나, 어제의 나로 돌아온다. '나'는 과거로부터 이어진 기억과 경험의 총합이다.
과거의 연장선 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살아온 결과 즉 누적된 '나'의 경향에 따라 대상에 대하여 습관적으로 반응한다. 또 우리의 습관적 반응, 즉 경향성은 비슷한 대상들에 비슷한 반응을 하며 점점 더 강화되어 간다. 좋았던 것은 계속 좋고, 싫었던 것은 계속 싫다. 싫으니까 싫고 싫어서 더욱 싫어진다. 좋은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강화된 경향성은 각자의 성격, 취향, 습관, 그리고 어떤 것들에 대한 호불호로 나타난다.
경향성을 벗어나 괴로움의 형성을 막는다
많은 수행자들은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형성된 경향성, 즉 습관적인 반응에서 벗어나 현재의 경험들, 감각들을 있는 그대로 보려 노력했다. 경향성(습관)으로 오염된 인식에서 벗어나고, 몸이라는 유한자가 가진 감각과 인식의 한계를 초월하려는 시도였다. 많은 수행자들은 육체의 고통을 초월하는 것을 수행의 목표로 삼았다. 감각 중 가장 강렬한 감각인 고통을 초월함으로써 감각에 대한 습관적인 반응을 초월하려 했다. 육체적인 감각을 뛰어 넘는 것만으로 인식의 차원을 높이거나 근원적인 괴로움에서 벗어 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이는 싯타르타였다.
붓다는 우리의 괴로움(苦)은 비교하는 마음과 좋고 싫음을 따지는 마음에서 나온다고 여겼다. 그는 호불호를 만들어 내는 우리의 습관적인 반응을 멈추고 마주하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면 호불호에서부터 시작되는 괴로움의 생성을 차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즉 습관적으로 대상에 반응하는 ‘나’라는 틀을 벗어난다면(無我) 비교하는 마음과 좋고 싫음을 따지는 마음(집착)를 벗고 괴로움이 생겨 날 여지가 없어진다(해탈) 생각했다.
나에게 명상은
내가 이해한 명상은 '나'라는 인식의 개체가 연속된 인식의 총체일 뿐임을 깨닫는 방법이며, 동시에 대상과 경험에 대한 우리의 습관적 반응, 즉 경향성을 차단함으로써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이다. 명상을 통하여 '나'라는 인식의 틀을 벗어나고 무전제의 자아로서 대상을 마주하는 것은, 그리하여 괴로움의 생성을 근원적으로 차단하여 괴로움으로부터 구원 받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아주 먼 과제로 느껴진다.
다만 나는 명상을 하는 동안 내 마음의 움직임에 귀기울일 수 있었고 내가 그동안 어떻게 습관적으로 반응하며 살아왔는 지를 조금이나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멈추면 보이는 것이 있다는 말처럼 명상을 하며 나는 나 자신에 대하여 조금씩 더 많이 알아 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것이 내가 명상이 점점 더 좋아지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