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많이 맞아서 더이상 아프지 않은 사람을 알고 있는지.
아픔을 많이 겪은 사람일수록 통증과 고통에 무감하다. 웬만한 일에서 눈물을 잘 흘리지 않을뿐더러, 객관적으로 슬픈 일인데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냥 넘어간다. 그러다 어느날 비어버린 껍데기만 남은 자기 자신을 보고 상당히 낯설어하는 식이다. 물론 그 발견의 순간도 그다지 아프지 않다. 낯설 뿐.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위의 문장으로 시작하는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은 1942년도에 출판됐다.
소설은 주인공 뫼르소가 엄마의 죽음을 깨닫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주인공은 엄마의 죽음에도 아무 감정의 동요가 없다. 무심하게 장례식에 참석 했다가, 일상으로 돌아와 해변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중 친구가 아랍인과 시비가 붙는다. 뫼르소는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충동적으로 아랍인에게 총을 쏴 살해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체포돼 재판에 넘겨진다. 사형 선고를 받는 상황에서도 뫼르소는 자신의 상황에 무관심할 뿐이다.
'나는 행복했지만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주인공 뫼르소는 행복이나 불행이나 자신의 인생에서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세상이 무의미하고 부조리하기에,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그냥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살인자만 아니었다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대체로 살인자들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 중에 나타난다.
'태양 때문이었다'
주인공 뫼르소가 살인을 저지른 후 그 이유를 태양 탓으로 돌리는 구절이다. 그저 볕이 뜨거워서 사람을 죽였다는 설명으로, 인간 행동의 무의미와 불합리성을 드러낸다. 하긴 길을 가다 살인을 저지른 행위 자체가 부조리한데 어떻게 설명이 그럴듯할 수 있겠나.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다 죽어가고 있다'
알베르 카뮈는 세상이 본질적으로 비합리하고 무의미하다고 봤다. 인간이 이 불합리함을 깨닫고도 삶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부조리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또 다른 작품 <시지프 신화>에도 드러나는 관점인데, 카뮈는 끝없이 반복의 형벌을 받는 시지프스를 인간 삶의 상징으로 사용한다.
세상은 뫼르소를 사람들과 정서적으로 단절된 인물이라는 이유로 비도덕하고 위험한 존재로 판단한다. 아무 감정 없이 사람을 살해한 행동은 분명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이다.
카뮈는 뫼르소를 영웅적이거나 이상적인 인물로 그리지 않았다. 사회는 이기적이고 감정적으로 무감각한 한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려낸다.
세상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감정과 규범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소외되고 비난받는다. 사람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감정을 표출해야 하고, 규범을 따라야 한다는 룰은 폭력이자 부조리다.
뫼르소는 왜 그런 인간이 되어버렸을까?
태초부터 무감각하진 않았을텐데 말이다. 그건 인간의 본성이 아니다.
한강 작가님 책을 기다리면서 알베르 카뮈를 읽는다면 더없이 훌륭할 것이라 생각한다. 한강 작가님과 알베르 카뮈의 문제의식이 맞닿아 있는 측면이 많다.
한강 작가님의 작품에는 세상의 폭력에 고통받는 사람들의 아픔과 치유에 집중한 소설이 많다. 알베르 카뮈는 본질적으로 기이하고 부조리한 세상과, 그 불합리한 세상에서 저항하는 인간을 그려낸다. 문체와 정서는 많이 다르지만 이야기하는 주제와 문제의식이 맞물려 있다. 카뮈의 <페스트>와 <이방인>은 꼭 읽어야 한다.
살다보면 뫼르소 같은 사람들을 볼 때가 있다. 뫼르소처럼 타인을 살해하는 대신 자기 자신을 죽였다. 자기가 죽어버려서 아픈줄도 모르고 무감하게 산다. 스스로를 살펴본지 너무 오래됐다. 시간낭비라 믿기 때문이다. 자기를 돌보는 게 우선순위가 아닌데다가, 생존에 불리하다고 판단한다. 돈이 안되는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밀어둘 수도 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감정 같은게 보이는대로 검정 쓰레기 봉투에 집어넣어 버린다.
그런 사람들도 한때 타고난 취향이라는 게 있었다. 컵 하나를 고를 때도 색깔이라던지, 디자인이라던지, 입에 닿는 느낌이라던지 그런걸 꼼꼼하게 따지던 날이 있었다. 좋아하는 길을 걷고 싶어서 빠른길 말고 일부러 멀리 돌아서 걸었던 날이 있었을 것이고, 쌀쌀하게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공연히 마음이 동해 이 음악 저 음악 찾아본 날도 있다. 바보같고, 무용한 그런 행위들 말이다.
한때 소중했던 취향들이 어느순간 외면 당했을 것이다. 좋아하던 공간과 노래, 정성스러운 음식 차려 먹기 같은걸 중단하면 사람은 서서히 건조되어 간다. 아마도 그들이 사는 세계가 그들의 감정을 짓밟고, 무시했을 가능성이 크다. 세상이 너무 돈과 돈, 그리고 또 돈을 외치고 최단기간에 최대효율을 내야 한다고 밀어넣고 있어서다.
마치 부조리한 세상에 사는 뫼르소가 자신의 부조리함으로 대항하듯이, 압박하는 사회에 깔려 납작해져 버리고 만 사람들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순수하게 몰두하고 골몰하는게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세상은 말해주지 않는다. 특히 한국 사회는 좋아한다는 가치를 짓밟아 버린다. 뭔가가 재밌다고 하면 그게 돈이 되냐는 식으로 조소하고, 도전해보고 싶다고 하면 집에 돈 많냐고, 금수저냐고 비웃는다. 이렇게 수준 낮은 주변인들로부터 너무 많이 시달리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정신과 개성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몸만 교통사고를 당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정신과 개성도 트럭같은 것에 깔릴 수 있다. 입만 열면 개같은 소리만 하는 사람들로부터 내가 나를 지켜야 한다.
예술가들은 순수한 열정에 자기 삶을 다 바쳐가며 증명한다. 평생을 다 태워서라도 쓰고 싶은 주제가 있으며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위대한 예술가일수록, 그 이야기를 결코 개인에 국한하지 않는다. 인류 공통의 감정으로 확장시켜 나간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 삶에서 어느정도의 예술 행위를 해 나가야 한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자기 치유의 방법 중 하나다. 뭐가 됐든 괜찮다. 춤이건 노래건 그림이건. 독서만으로도 훌륭하다. 행위를 떠올렸을 때 설레는 감정이 있다면 그것을 붙들었으면 좋겠다. 설령 며칠 하다 그만두더라도 자학하지 말고. 또 다시 하면 되니까. 그것만이 매일 어처구니 없이 돌아가는 세상에 나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다.
춤춰라, 아무도 보지 않는 것처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살아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싫으면 그냥 누워있어도 괜찮다. 부디 자기 자신을 좀 예뻐해 달라.
https://www.youtube.com/watch?v=9uxYuIpvsj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