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만 하는 하루도 없어야겠다.
(지난 6월에 겪은 일입니다)
"히이이이이이이이잉"
난데없이 경보음이 울렸다. 자정 열두 시 반을 넘은 시각이었다. 불이 났으니 대피하라는 기괴한 기계음의 방송이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거실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남편은 바지를 벗고 침실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평온한 새벽을 뒤흔들어버린 경보음, 순간 몸이 굳어버렸다. 잘 못 울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후드티를 걸치고 문을 열었다. 복도에는 주민들이 하나 둘 나와있었는데, 옆집 아주머니는 아무래도, 불이 난 것 같다며 계단으로 내려가야겠다고 했다.
"미쳤네, 미쳤다."
문을 닫고 나는 곧장 침실로 가 남편을 깨웠다. "여보! 불났대 불났대 빨리 나가자." 하는 말에도 웅얼웅얼 거리며 깨지 못하는 남편의 발바닥을 꼬집고 또 꼬집었다. 바지만 입고 나가자는 나의 말에, 남편은 수건과 생수를 챙겨야 된다고 했다.(수건에 물을 묻혀 입과 코를 막고 대피하는 게 맞긴 하지만) 나는 그런 건 모르겠고, 무서우니 제발 나가자! 하고 절규했다. 마침, 우리 집 냉장고에는 생수가 없었고, 겨우 핸드폰만 챙기고 집을 나왔다.
우리 집은 16층, 계단으로 내려가려면 한참이다. 계단에는 벌써 주민들이 모여 있었다. 다들 비슷한 모습이었다. 대부분은 잠옷을 입고 있었고, 또 대부분은 얼떨떨한 것이 아직 잠이 안 깬 듯했다. 나 또한 그랬다. 남편의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가는데 어찌나 마음이 조급하던지. 한 번에 계단 세 개 이상을 내려가다가 넘어질 뻔하기도 하고, 급하고 또 급했다.
겨우 10층에 내려왔다. 그때, 손녀의 부축을 받아 지팡이를 잡고 내려가시는 할머니를 만났다. 그제야 나는 할머니 뒤에 붙어서, 조금 속도를 줄여 침착하게 내려가려 애썼다. 그런데, 여전히 시끄럽게 울려대는 경보음 소리가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때, 참 신기하게도 엄마 아빠 얼굴이 불쑥 떠올랐다. 엄빠는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이 나는 존재인데, 그날은 더욱 그랬다. 그냥 오늘 전화 한번 할걸. 엄마 보고 싶다, 엄마, 내가 무사히 1층까지 내려갈 수 있을까.
8층에 도착했다. 사람이 더 많아졌다. 나는 발을 동동 굴렀다. 이제 겨우 반을 내려온 거였다. 남편은 걱정 말라며 손을 더 꽉 잡았다. 그때 우연히 든 생각 하나, 내가 오늘 마지막으로 먹었던 저녁식사가 떠올랐다. 그날은 남편이 야근을 했고, 나는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날이었다.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던 우리는 평소 자주 먹던 뼈해장국을 먹었다. 뼈해장국에 밥 한 그릇 하고 사이다로 입가심하는 코스는 우리가 좋아하던 것이었다.
어쩌면 내 지구에서의 마지막 섭취 음식이 뼈해장국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웃기게도 그 와중에 그게 참 후회가 되는 거다. 아, 오늘만큼은 조금 더 비싸고 안 먹어봤던 것을 먹어볼걸. 하는 생각.
정말 별의별 생각을 규칙 없이 하면서 계단을 내려오던 내 두 다리가 멈춘 곳은 3층 계단. 고막을 울리던 경보음이 멈추었고, 곧 경비아저씨의 음성이 나왔다.
"아,, 아. 주민 여러분들께 알려드립니다. 화재경보기가 오작동하여 방송이 나온 것으로, 우리 아파트에는 화재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한번.."
각자 계단에 멈추어 다행이라는 말을 내뱉었다. 경비아저씨의 말에 다리는 풀려버렸고, 그제야 평소보다 빠르게 뛰고 있던 가슴을 쓸어내렸다. 3층까지 내려왔으니 일단 1층에 내려가기로 했다. 경비실에는 경비아저씨들 여러 명이 모여 진상을 파악하는 듯했다. 현관에 하나둘 모여든 사람들, 모두 놀란 탓인지 곧바로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후회 없는 하루는 없다.
우리도 그랬다. 집에 들어가기 전에, 차에 올라 타 안정을 취했다. 라디오를 틀었다. 심야시간에 어울릴만한 잔잔한 팝송이 나왔다. 그제야 두근거리던 심장이 조금씩 평소의 템포를 찾아갔다.
"살았다. 살았구나."
좁은 차 안에서, 평온함이 주는 벅참을 느꼈다. 그런데, 5분 전까지는 다른 생각을 했었다. 생전 처음 느껴본 감정이었다. 마지막이라는 두려움에서 오는 공포심을 느끼면서 고작, 뼈해장국을 떠올리고 후회를 했던 순간. 평소 뼈해장국이 힐링푸드라고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녔으면서, 왜 후회의 감정이 밀려왔을까.
그건 아마, 아직 이 세상에서 먹어보지 못한,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음식들이 많은 탓이겠지. 다시 그날, 저녁으로 돌아간다 해도 우리는 뼈해장국을 먹고 만족스럽게 웃을 걸 잘 안다. 그런데도, 그 음식이 내 인생 마지막이었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허무한 메뉴라 생각한 것이다. 에이, 오늘만큼은 다른 것을 먹을걸. 하는 가벼운 후회 정도?
그런데, 내가 아주 고급 지고 맛 좋은 산해진미를 먹었다면 후회 따윈 없었을까? 생각해보니 그건 또 아니다. 아마 그때는 "그냥 내가 제일 좋아하던 뼈해장국을 먹을걸" 하고 후회를 할 지도.
후회만 하는 하루도 없어야겠다.
그날의 나는 80점 정도의 하루였다고 생각했다. 느지막이 일어나서 일을 하다가,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뼈해장국을 먹고, 야근한 것치곤 일찍 도착한 남편과 대화를 나누다, 먼저 잠든 남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는 거실로 나와 내일의 일을 미리 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100점을 줄 만큼 만족스러웠던 하루가 아닌가? 싶은데 나는 야근을 해서 남편과 조금 더 오래 시간을 못 보낸 것과, 조금 더 맛있는 것을 먹지 못한 아쉬움에 20점을 깎았다.
그러고 보니, 후회 없는 하루는 없다. 밥 대신 빵을 먹고는 속이 더부룩 한 어제의 점심도 후회스러웠고, 남편에게 괜히 툴툴 댔던 오늘의 저녁도 후회스럽다. 후회 없는 하루를 떠올리는 건 참 어려운 일이었다. 후회만 하는 하루도 없어야겠다. 그리고 한 시간짜리의 후회를, 24시간짜리의 후회로 만들어내는 일도 없어아겠다.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우리 집 침대가 이렇게 폭신했던가, 우리 집 이불의 촉감이 이렇게 좋았던가. 익숙했던 공간이 새롭게 다가왔다. 여행지 마지막날 처럼, 쉽게 잠들지 못했던 그날 밤, 다음날에는 부모님에게 전화 한번 해야지 라는 생각을 했다. 내일의 내가 또 후회하지 않도록. 후회스러운 일들을 조금씩 줄여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잠옷을 입고 계단을 내려왔던 그날은 분명 후회 없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