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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돌 Jun 09. 2022

예정일이 언제냐는 질문

새롭게 얻은 엄마 친구들에 대하여

만삭의 임산부가 부른 배를 움켜잡고 8월의 불볕더위를 걷고 있자면, 그러다 드디어 버스 정류장을 만나 끙차, 하고 무거운 소리를 내며 버스정류장에 앉으면, 동네 할머니들은 괜히 말을 걸어보고 싶어지는 모양이다.


언제 몸 풀어요?

아, 8월 말이 예정일이에요.

아이고, 덥겠다~ 나도 8월 광복절에 애를 낳았는데, 애 품고 있을 때도 덥고, 낳고 나서도 덥고, 산후조리할 때도 어찌나 덥던지.


시어머니가 산후조리할 땐 찬바람 맞는 거 아니라고, 씻지도 못하게 했어.

너무 더워가지고 몰래 찬물에 발 씻었는데, 지금도 그 발목이 시려~ 그게 평생 회복이 안돼~


이제 옆자리에 앉은 할머니까지 가세한다.


그래 그게 회복이 될라카믄 둘째 낳을 때 조리를 잘해야 된다. 둘째 낳을 거 아니면 첫째 낳고 몸조리를 잘해야 돼~


그래서 나중에 둘째는 겨울에 2월에 낳았지.

그게 여름에 애 낳는 것보다는 훨 수월해~



이제 대화는 출산에서 넘어가서, 그 8월생 아이와 2월생 아이가 지금 오십몇 살, 육십 살이고 그 아이의 아이가 이제 곧 결혼 예정이라는 대서사시로 넘어갔다.


아무래도 한창 더울 때 아기를 낳은 모든 엄마들은 여름의 만삭 임산부를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되어버리나 보다. 이번엔 동네 서점에서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 소설을 한 권 사서 나오는데, 서점 주인이 말을 걸었다.


예정일이 언제예요?

8월 말이요.

어머 나랑 같네~ 나도 8월에 더울 때 아기 낳았는데 정말 너무 덥더라고요~

근데 아기 낳고 나면 더 더워요~ 근데 에어컨도 막 못 틀게 하고~ 정말 너무 힘들더라고요~


나는 더운 여름에 아이를 낳는 것에 대해 아무 불만이 없다. 오히려 이 여름 출산 어머니들의 걱정과 오지랖과 ‘나 때는 말이야’를 듣게 되어 신이 난다. 서점 주인은 내가 산 책을 포장하며 예쁜 연필 몇 개를 선물로 챙겨주었고 나가는 길에는 책방 문도 잡아주었다.  순산하세요!라는 말을 들으며 서점을 나서는 길, 괜히 마음이 뭉클해졌다.


아이를 가졌다는 이유로, 비슷한 시기에 출산한다는 이유로 받는 관심과 친절은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것이었다. 내가 뭔가를 이루어서, 뭔가를 잘해서가 아니라 산모와 뱃속의 아이에 대한 순수한 환대.






임산부 티가 나는 배를 안고 퇴근길에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참이었다. 같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옆

부서 선배가 말을 걸었다.


"예정일이 언제예요?"


평소에는 업무 이야기만 하던 사이였는데 우리는 어느새 임신했을 때 가장 땡겼던 음식은 무엇인가로 한참 수다를 떨었다. 선배는 임신했을 때 매콤한 것만 먹혀서 비빔면을 궤짝으로 사두고 먹었다고 했다. 그녀가 두 아이의 엄마이고 올해 첫 아이를 학교에 보냈다는 것도 그날 처음 알았다. 그리고 이 ‘맘스 토크’는… 뜻밖에도 무척 즐거웠다.


아이 어린이집 픽업을 가야 한다는 그녀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헤어지면서 생각했다. 아아, 나는 이제 완전히 다른 세계로 들어가고 있구나. 이제 나의 대화 주제는 점점 육아로, 이 어린이집으로, 아이 학교로 옮겨갈 것이다. 온전히 나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던 세계와는 이제 작별인 대신 수많은 엄마 친구들을 얻었다.


앞으로 내 삶은 어떻게 변해가게 될까. 결혼을 하고서도 한참 동안 임신을 망설였던 건 결혼은 어떻게 되돌릴 방법이라도 있지만 임신과 출산은 그야말로 비가역적인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요즘은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의 즐거움만큼이나 그 어려움에 대한 콘텐츠도 넘치는 시대다. 특히 아이를 낳고 키우는 여성이 무엇을 포기하고 희생하는지를 소상히 알게 되니 더 두려워졌다.


대부분의 콘텐츠들은 말했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그 강을 건너게 되면 다시는 자유롭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 무서웠다. 친한 친구들도 대부분 비혼 또는 딩크가 대부분이라 더 겁이 났다. 이제 나라는 사람의 인생은 끝나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원해서 한 임신임에도 여러 날을 잠 못 이루기도 했다.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배에 탑승해 버린 나는 여전히 두렵지만 새롭게 만난 친구들을 보며 위안을 얻는다. 할머니도, 서점 주인분도, 회사 선배도 어떻게든 출산을 했고 아이를 키웠으니 나도 어떻게든 해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한 번도 가 보지 않아 낯선 길이겠지만 아주 많은 사람들이 거쳐갔던 길이다. 힘들면 누구라도 붙잡고 징징거리면 “힘들지, 사실 나도 그랬어.”하고 눈물 닦아 줄 사람 하나쯤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언젠간 나도 더운 여름 만삭의 임산부를 만났을 때, 마의 그 질문, “예정일이 언제예요?”를 물으며 순산을 응원해 줄 수 있게 되기를. 그의 표정이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에 차 있다면 괜찮아요, 그 강 건너와 봐요, 나쁘지 않아, 겁 많은 나도 했는데요 뭐, 같은 오지랖을 부리며 원래 넉살 있는 사람인 척을 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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