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별사람들 19화
퇴근 후 집에 가니 언제나 반가운 막내 조카가 와있었다.
"오늘은 말미잘이랑 같이 왔어요."
"형아한테 말미잘이라고 하면 안 되지."
"우리 엄마도 말미잘이라고 한다고요!"
막내조카가 귀엽게 혀를 쏙 내밀고 할머니한테 쪼르륵 달려갔다.
말미잘은 사춘기를 세게 앓고 있는 큰 조카의 별칭이다. 아니, 멸칭인가?
바보 똥개 해삼 멍게 말미잘할 때 그 말미잘
그러니까 말미잘은 일종의 욕이다.
아무리 사춘기라도 말미잘은 너무 심한 거 아닐까?
방문을 열자마자 고막이 터질 것 같았다.
큰 조카는 내 침대에 대자로 누워 스마트폰 음악에 맞춰 노래인지 랩인지 알 수 없는 소음을 고래고래 내지르고 있었다.
널브러진 이불, 아무렇게나 벗어던진 양말, 과자 부스러기 출근할 때와 사뭇 다른 돼지우리 같은 모습에 아뿔싸, 나도 모르게 그 말이 튀어나왔다.
"이 말미잘!"
"왔어? 삼촌, 나 책 좀 찾아줘."
"뭐?"
"엄마가 여기 있대. 연금술사, 파... 뭐라더라 파 뭐시기 들어가는 작가 거"
"파울로 코엘료, 말미잘이 책을 읽어?"
"아, 이러기야? 나도 왕년에 책 좀 읽었다고."
"됐고, 책 받고 싶으면 당장 일어나 방 치워! 실시!"
말미잘은 투덜거리며 방을 치우기 시작했다.
딱히 잘하는 거 없이 공부만 하던 큰 조카는
고1 기말고사 후 학업을 중단하고 게임유튜버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어릴 적부터 큰 조카의 꿈은 생명공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고사리손일 때부터 과학책을 뒤적이며 초롱초롱 눈을 밝히던 녀석이 갑자기 게임유튜버라니!
"되겠니? 게임 잘하는 거 그거 재능이야! 근데 너 게임 못하잖아?"
말미잘은 엄마에게 그런 말을 듣고도 굴하지 않았다.
1년째 녀석은 자기 고집을 고수하는 중이다.
공부하던 때보다 몇 배 더 게임에 매진했지만,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블론즈를 벗어날 길은 없어 보인다.
이럴 거면 뭘 해도 못하는 콘셉트로 콘텐츠를 만드는 편이 나을 텐데... 나는 녀석이 측은해졌다.
"네 방이냐? 주인 없이 함부로 쓰면 돼? 안돼?"
"아, 깐깐하네. 삼촌 결혼 하려면 너그럽게 좀."
"응, 반사. 근데 왜 갑자기 연금술사를 읽겠다는 거야?"
말미잘은 바닥에 있는 과자부스러기를 싹싹 긁어모으며 속내를 털어놨다.
학교에서 점점 공부 못하는 학생이 되어간다.
공부를 안 하니 성적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도 생각보다 충격이 컸다.
사회에 불만이 생겼다.
고등학교 1학년이 알면 뭘 안다고, 1학년때 시험 한번 망했다고 대학입시는 끝이란다.
등급이 어쩌고 저쩌고 어차피 가고 싶은 좋은 대학은 못 간단다.
나는 실패했다. 겨우 만 15세에 낙오자가 된 것이다.
사실, 공부를 해도 성적이 안 나올까 봐 겁이 났다. 그러면 어떡하지?
내가 실패했다는 걸 공공연하게 증명하면 어떡하지?
그래서 어차피 성적이 떨어질 거면 공부를 안 하는 편이 낫겠다고 싶었다.
바닥에 바닥을 본다.
생각보다 너무 힘들다.
이젠 정말 공부를 못하게 됐구나. 나는 해도 안 되겠구나.
과학과목을 선택해야 할 때가 왔다.
물리는 공부 잘하는 애들이 선택하는 과목이다.
지금 상황에서는 내가 잘 할리 없다.
너무 어렵고 좋은 점수를 못 받을 게 분명하다.
물리를 선택 안 하면 된다. 더 쉽고 점수가 잘 나오는 지구과학을 선택하면 그만이다.
과학만큼은 바닥을 보고 싶지 않다. 비웃어도 좋다. 내 마지막 자존심이다.
어릴 적 꿈을 내 손으로 놓아버리고 싶지 않았다. 제발.
"그런데 왜 물리를 선택 안 하는 거야?"
엄마가 물었다.
"점수 따기 어려워요."
"너 생명공학 하고 싶어 했잖아."
"따라가지 못할 거예요. 공학전공 선택 안 하면 되죠. 그냥..."
나도 모르게 속마음이 나와버렸다. 대학 안 갈 거라면서 공학 선택을 안 한다니. 엄마가 나를 비웃을 게 뻔했다. '게임 유튜버한다더니 공부는 안 하면서 대학은 또 가고 싶어?' 엄마가 그런 말을 할까 봐 얼른 고개를 숙였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괜찮아. 그냥 해."
"됐어요. 대학도 못 가는데 무슨 소용이에요."
"뭐 어때? 네가 좋아하는 거잖아. 점수가 뭐가 중요해. 그런 거 하나도 안 중요해."
고개를 들어보니 엄마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팩트폭격기 엄마인데. 오늘 왜 이러시지?
"남들이 평가하는 거 상관없어. 점수 안 나오면 어때? 아들, 하고 싶은 건 해. 그래야 후회가 없어. 다른 사람 인생 아니고 너 인생이잖아."
"...."
"남들보다 꼭 잘해야 하는 거야? 그냥 네가 하고 싶으면 하면 되는 거야. 네 꿈이었잖아. 좋은 대학이 아니어도 상관없고, 대학을 안 가고 상관없는 거야. 그냥 네가 좋아하는 걸 선택해. 이거 게임유튜버 하지 말라는 거 아니야. 게임유튜버하고 좋아하는 과학을 할 수도 있는 거잖아. 다 괜찮아. 너 모르지? 엄마도 여전히 꿈꾼다. 살면서 먼저 해결해야 하는 일이 있어서 천천히 가는 것뿐이지 절대 포기하지 않아. 내가 하고 싶은 걸 열심히 찾고 마침내, 행복하면 그만이지. 늦으면 뭐 어때? 그러니까 내 말은 늦지 않았다고. 아들, 마음가는대로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
오랜만에 베란다에 있는 책상자를 꺼냈다. 책상자를 여는데 먼지가 풀풀 일어났다. 나는 옛이야기에 나오는 고서같이 변한 연금술사를 꺼내 조카에게 건넸다. 한때 고사리손을 가진 독서광이었던 똘똘한 눈동자의 18세 소년이 말했다.
"엄마가 나만할 때 읽었다니까 한번 보고 싶었어."
그 날밤,
사춘기에 허우적거리는 조카는 늦게까지 연금술사를 읽다가 내 침대 위에서 잠들었다.
이런 말미잘! 졸지에 나는 바닥에서 잘 수밖에 없었다.
지상의 모든 인간에게는 그를 기다리는 보물이 있어. 그런데 우리들. 인간의 마음은 그 보물에 대해서는 거의 얘기하지 않아. 사람들이 보물을 더 이상 찾으려 하지 않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어린아이들에게만 얘기하지.
그리고는 인생이 각자의 운명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그들을 이끌어가도록 내버려 두는 거야. 불행히도. 자기 앞에 그려진 자아의 신화와 행복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은 거의 없어. 사람들 대부분은 이 세상을 험난한 그 무엇이라고 생각하지.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세상은 험난한 것으로 변하는 거야. 그래서 우리들 마음은 사람들에게 점점 더 낮은 소리로 말하지. 아예 침묵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우리의 얘기가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기를 원해. 그건 우리가 가르쳐준 길을 따라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걸 바라지 않는다는 듯이지.
마음이 그에게 속삭였다.
"어째서 마음은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자신의 꿈을 따라가야 한다고 말해주지 않는 거죠?"
그는 연금술사에게 물었다.
"그럴 경우,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마음이기 때문이지. 마음은 고통받는 걸 좋아하지 않네."
그날부터 그는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마음에게 절대로 자신을 버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자신이 꿈에서 멀어지려 하면, 자신을 가슴속에 꽉 붙잡아두고 경적의 신호를 보내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마음의 신호가 들릴 때마다 꿈을 놓치지 않도록 주의하겠노라고 맹세했다.
<연금술사 - 파울로 코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