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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영 Jun 23. 2024

작가의 말

행복한 삶에 대한 열망

'자살'을 뒤부터 읽으면 '살자'가 된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어쩌면 너무도 살고 싶은 것이 아닐까. 삶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너무 버겁고 그럴 때 나는 종종 삶이 무의미하다고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더랬다.


희유는 내가 아니다. 따라서 유영이 남편이 아니고 희성이 나의 오빠도 아니다. 그러나 희유는 '나'가 투영된 내가 애정하는 캐릭터다. 


희유는 직장을 그만두는 것조차 자기 의지대로 할 수 없는, 비난받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수동적인 캐릭터지만 결국 할 말을 다 하고야 마는 '나'의 전형이었다. 그녀의 고민과 슬픔은 '나'의 고민과 슬픔이었다. 


잘살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안정되고 싶고 여유롭고 싶은데 현실은 자꾸만 기대와 멀어졌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에 갑작스러운 사별의 경험이 증폭제가 되어 무기력함이 커졌다.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 열심히 해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 속에서 발버둥 치는 나 자신이 딱했고 이렇게 발버둥 치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내 삶을 가치롭지 않게 느끼게 만들었다. 


한 때는 짙은 우울감에 빠져 살았다. 상담을 받아보지 않았으나 나는 나 자신을 만성 우울증이라고 진단했었다.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했고 무엇하나 만족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하루하루의 정해진 스케줄을 해소해 가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곤 저 너머의 세상을 궁금해했고 동경했었다. 오빠와 친구가 가 있는 세상. 나라고 갑자기 이곳을 떠나지 말라는 법은 없어 보였다. 


나는 내 가족을 향한 사랑과 책임감이 나를 이 세상에 붙들어 놓는다고 생각했다. 내 가족을 자살 유가족으로 만들 수 없었다. 부모에게 말도 안 되는 슬픔을 두 번 겪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꾸역꾸역 버티며 끝도 모를 우울의 터널을 지난다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써 본 소설이었다. 캐릭터의 성격을 구체화했더니 작업이 수월했다. 작품을 쓰면서 깨달았다. 내가 삶을 너무나 애정하고 있었다는 걸. 나는 누구보다 잘살고 싶어 한다는 걸. 삶에 욕심이 많아 이것도 가지려고 했고 저것도 가지려고 했으며 갖고 있는 것은 보지 못한 채 못 가진 것만 보고 있음을.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글쓰기를 통해 만성 우울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내가 느낀 우울은 삶의 허무였다. 인생무상이 나를 나락으로 떨어뜨렸고 나는 바닥을 치면서 내가 얼마나 삶의 의지가 강한지를, 이 세상을 얼마나 누리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희유의 삶을 꾸려나가는 과정은 내 삶을 돌아보는 과정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녀는 내가 아니었기에 더더욱 자유롭게 삶을 꾸려나갈 수 있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했었더랬다. 그러나 그것은 잘살고 싶다는 몸부림이었다. 여전히 내게 삶은 어렵다. 역시 너무 잘살고 싶기 때문이다. 희유의 현실도 크게 변하지 않았으나 희유 자신은 힘을 냈다. 나도 그렇다. 세상이 녹록지 않아서 내 삶은 살아볼 만하다. 이겨내는 재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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