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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포걷달 Jun 26. 2024

FW #27, 광교 편- Left(36.28km)

누적거리: 971.28km, 누적시간: 192시간 21분

표지사진: 성남시 낙생대공원, ‘남겨진 그 길’



나는 오늘 양재를 따라 왼쪽으로, 광교호수를 향해 걷습니다



아침부터 날이 흐리다. 모처럼 엄마가 충주에서 올라오셨다. 어제 수원에 있는 친척 결혼식장에 모셔다 드리고, 오신 김에 우리 집에서 하룻밤 주무시고 가라 했다. 사실 자주는 못 보니까, 기회 될 때마다 손녀 얼굴 한 번이라도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한 일이라 생각했다. 엄마가 참 행복해하신다.


기억을 되살려보면, 엄마는 잔소리보다는 ‘자주 삶이 아픈 소리’를 많이 하셨던 것 같다. 장남으로서 그럴 때마다 막중한 짐이 어깨에 드리워졌고, 나는 그걸 해결하면서도 항상 도망갈 궁리만 했었던 것 같다. 어쩔 때는 지긋지긋한 궁상이 싫어 얼굴 붉힌 채로 큰 소리를 낸 적도 있었고, 그럴 때마다 나는 후회와 번뇌로 가득 찬 청춘을 보냈었다.


돌이켜보면 가족이고 인생인데, 꼭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마음은 그렇지 않았지만 ‘사랑한다는 말만큼이나 죄송하다는 말’도 못 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엄마한테도 ‘사랑한다는 말’ 또한 들어본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리웁다 그 말. 엄마도 그리웠을까? 나이가 들어가면서 아들은 아들대로, 엄마는 엄마로서 서로의 가깝고도 먼 간극을 유지한 채 평생을 살아온 것 같다. 그 삶이 참 애틋하다.


그리웁다 그 말. 엄마도 그리웠을까?





“얘! 이제 가자!” 하룻밤을 주무시고 아침 8시가 넘어가자 엄마가 주섬주섬 짐을 싸신다. 반포고속터미널까지 택시로 모셔다 드리고, 오늘 나는 어제 느낌이 좋았던 ‘수원’으로 걷기로 했다. 어젯밤부터 생각지 않았던 초행길, 게다가 내 인생 가장 먼 거리를 걷는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떠 있었다.


택시에서 내려 엄마를 배웅해 드리고, 나는 걷기를 시작했다. 오늘 정확한 목적지는 수원시에 있는 ‘광교호수’이다. 언젠가 우연히 놀러 간 적이 있는데, 광교호수와 주변 아파트 단지에 매료된 적이 있었다. 아파트 입구와 이어지는 넓은 호수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 뛰어노는 아이들과 수시로 열리는 페스티벌로 행복이 넘실대는 모습에 ‘아! 여기 정말 근사하구나’ 소리가 나도 모르게 새어 나왔던 곳. 광교는 송도 센트럴파크에 이어 내 평생 기회가 되면 살고 싶은 최고의 지역이 되었다.

광교호수공원은 수원시 영통구 하동에 위치해 있으며 광교신도시의 랜드마크이다. 일산호수공원의 1.7배에 다다르며, 이전에는 ‘원천유원지’로 불리어지다 대대적인 공사를 통해 2013년 11월 현재의 호수공원이 되었다. 호수공원 한 바퀴를 돌면 약 3km의 거리가 나오므로 가볍게 산책 또는 러닝 하기에 좋다.
반포(센트럴시티터미널) > 양재 > 성남 판교로 해서 이동하는 계획을 세웠다. 경부고속도로를 중심으로 왼쪽으로 내려가는 코스이다



반포고속버스터미널에서 양재역까지 가는 길에, 우연히도 근래 초등교사의 극단적 사망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서이초등학교’를 지나치게 되었다. 교문 옆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화환들이 잔뜩 늘어서 있었고, 왠지 숙연해지면서도 어린 학생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련해졌다. 이렇게 교권은 중요하면서도 서로의 인권과 실시간으로 부딪히고 있었다.


내 어릴 적 생각을 해 보면 학생들에게 인권은 남의 나라 이야기였다. 고등학교 때 수업시간에 콧노래를 흥얼거렸다고(나도 모르게) 미술 선생에게 엄청나게 매질당했던 일이 아직도 생생하다. 진짜 허벅지에 피가 맺히고 그 멍이 없어지는 데에 수 주일이 필요했고, 그 사이 어떻게서든 집에 들키지 않으려 노력했던 기억들이 지금도 애처롭다. 선생의 교권이 바닥으로 떨어진 현실도 안타깝지만, 또 아이의 인권을 짓 밝았던 행태는 절대적으로 원치 않는다. 그저 아이와 학부모가 선생을 존중해 주고, 선생은 모든 아이들에게 인정과 공정이 가득했으면 한다.


서초동을 빠져나와 양재동 ‘양재시민의 숲’에 이르니 하늘이 맑아지기 시작했다. 아직은 구름이 더 많지만, 틈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이 세상을 열고 있었다.

양재대로, ‘양재동화훼공판장’을 지나 청계산로 청계산입구로 걷는다


경부고속도로를 사이에 두고, ‘부산 가는 방향으로 왼편’에는 양재, 내곡동, 대왕저수지를 지나 판교로 이어지는 길이(청계산로) 있다. 서울에서 판교와 분당을 가는 데 걸어서 갈 일이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코스가 꽤나 낯설고 음습했다. 시간이 어느덧 오전에서 오후로 기울어가면서 잊었던 더운 바람마저 저수지를 타고 가득 불어왔다. 훅~ 뜨거운 한기가 느껴진다.

양재동에서 청계산입구로 가는 길, 청계산로. 가는 중에 아무도 이용하지 않을 듯, 어린이공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청계산 입구에 다다를즈음, 신분당선 ‘청계산입구역’ 근처에 있는 ‘청계산수변공원’이 정갈하고 넓찍하게 잘 꾸며져 있다
‘대왕저수지’ 가는 길은 한적하고 음습하지만, 도중에 드라이브족을 위한 먹거리 유명 식당이 많은 편이다



몸이 지치지 않게 준비한 물 서너 병을 벌써 몸에 채웠음에도 갈증이 끊기지 않았다.


아.. 지루한 싸움이다. 고속도로만 아니지, 그 못지않게 끊임없이 긴 도로구나


거리가 가늠이 안되다 보니 저 보이는 길 언덕 너머가 판교인지, 아직도 내곡동에 가까운지를 모르겠다. 한참을 걸어 올라가니 용서(용인/서울) 고속도로로 빠지는 고가 넘어, 새 건물들이 우후죽순 서 있는 동네가 보이기 시작한다. 판교 초입에 다다른 것이다.


판교에서 죽전까지는 ‘대왕판교로’라고 해서 직진거리로 약 10km 구간이다. 이제 도시 안으로 들어왔지만 꽤나 긴 거리를 크게 볼거리도 없이 천천히 걸어가야 했다. 반포에서 여기까지 걸어온 거리가 20km 정도인데, 생각보다 꽤나 멀리 걸어온 듯한 환상이 든다. 아무래도 도시 경계선을 넘었고, 그 경계선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는 벌판에 가까웁다보니 결국 오늘은 지루함의 싸움이다. 오래 걷기의 적은 ‘졸음’, ‘지루함’, ‘불안’, ‘피로’와 ‘부상’인데, 오늘은 ‘부상’을 제외한 모든 적들이 내 몸 옆에 서서 툭툭 건드린다.

성남시 분당구 ‘판교테크노밸리’, 일요일은 한가롭다
분당구 삼평동의 ‘화랑공원’. 인근에서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대왕판교로의 끝없는 직선길. 주로 아울렛매장과 자동차매장이 있으며, 특히 ‘은혜와진리교회‘ 판교 성전이 눈에 띈다
끝도 없이 걷는다, 결국 신분당선 ‘동천역’에서 더위와 피로에 지쳐 털썩 주저 앉았다


시간은 어느새 오후 4시 30분을 지나고 있다. 아침 10시 20분에 출발해서 밥도 안 먹고 약 6시간을 꼬박 걸었다. 지루한 ‘대왕판교로’를 따라 죽전역 근처에 오게 되면, 이제 죽전에서 광교로 빠지는 길이 나온다. ‘얼마 안 남았다’라는 생각에, 없던 힘이 쑤욱 생긴다. 뜨거운 태양도 저 너머로 사라져 간다.


결국 한 시간 가량을 더 걸어 마침내 ’광교호수공원’에 도착했다. 느지막한 오후라 뛰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의 생기 있는 얼굴과 찌든 내 얼굴이 대조된다. 그래도 여기까지 걸어온 나를 스스로 대견해하고 칭찬한다. 잊은 배고픔이 되살아난다. 평소 잘 마시지도 못하는 시원한 맥주와 초밥이 정말 꿀맛이다. 오늘 나는 ‘서울에서 광교까지 왼쪽으로 걸어온, 대한민국 최초의 남자’가 되었다.


죽전까지 걸어오면 이제 오른편으로 틀어 광교로 넘어가면 끝이다. 저 멀리 ‘수지현대성우아파트’의 굴뚝이 우뚝 서 있다
용인시 상현동과 수원시 하동이 맞붙어 있다. 드디어 광교호수공원 초입으로 들어선다
광교호수공원이 한적하다. 태양이 완전히 넘어가면, 광교는 수 많은 불빛으로 태양보다 강한 ‘밤의 낮’을 선사하겠지


- 끝


반포 > 서초 > 양재 > 청계산 > 내곡 > 판교 > 정자 > 미금 > 죽전 > 광교로 이어지는 총 36.28km, 43,101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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