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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시대에게 - 4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 (하)

by 곽민주

우혁이는 나를 만날 때마다 조금씩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를 꺼내 보이기 시작했다. 그건 내가 동의를 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였다. 우혁이와의 만남을 지속하려면, 그 관계를 유지하려면 나는 무조건적으로 우혁이의 환경을 수용하거나 융합되어야만 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우혁이네 가족은 오호츠크해 부근에 거주하고 있었고, 인어는 인간의 모습으로도, 물고기의 모습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 다만 우리가 생각하는 상상의 동물처럼 반인반수의 형태라기보다는 물속에 들어가면 물고기의 형상이 되고, 물 밖으로 나오면 인간의 모습으로 지내는 것이 더 생존에 유리한 것이다. 우혁이의 턱 밑에 발달된 아가미는 물에 쉽게 열렸다 닫히기도 한다. 우혁이가 내게 사실을 털어놓은 뒤, 나는 내 앞에서 세수를 하는 우혁이를 똑바로 볼 수 있었다. 우혁이의 아가미가 열리다 닫혀지는 그 순간을.


그날부터 나는 우리의 현실을 조금씩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아는 우혁이는 나와 비슷한 종류의 사람이었는데, 우혁이가 자신이 인어라는 사실을 고백한 순간부터 나와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는 것을 차츰 깨닫게 된 것이다. 우혁이는 생선을 먹을 수 없다. 동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혁에게 횟집에 가자고 하는 건, 마트에서 해산물을 파는 코너에 가자고 하는 건, 마치 시체더미가 쌓인 전쟁터에 우혁이를 내모는 꼴이나 같았다. 그런 환경에 오래 놓이게 될 때면 우혁이는 다음날 악몽을 꾸곤 했다.


우혁이는 자신이 원할 때 물고기로 변할 수 있다. 인간이 많은 수영장, 목욕탕과 같은 공공시설에서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자기도 모르게 겨드랑이에서 몸통을 타고 생겨나는 지느러미와 열리는 아가미를 통제할 순 없다고 했다. 그러나 누가 물 속에서 아가미와 지느러미가 발달된 우혁이를 주목하겠는가. 우혁이의 지느러미는 물 속에서 보았을 때 투명해서 언뜻보면 얇은 털이 선 것 그 이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우혁 스스로도 눈에 잘 띄지 않도록 노력하는 편이기도 했다. 이러한 환경으로 인해 우혁이는 언제나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신경 쓰는 편이었다. 평소 사람이 많은 곳에 갈 때면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는데 그게 내향성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걸 나중에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우혁이는 새로운 환경에 취약하다. 물고기의 모습으로 태어난 우혁이는 알에서 태어난 개체다. 우혁에게는 두 개의 서식지가 있다. 현재 물고기로 살아가고 있는 가족을 따라 바다에서도 살 수 있고, 강에서도 살 수 있고, 나와 함께 집에서도 살 수 있다. 그러나 환경을 급격하게 바꿀 순 없다. 그래서 우혁에게 가장 잔병치레를 많이 할 때는 계절이 바뀌는 간절기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갈 때,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갈 때. 우혁이는 그때마다 가급적인 야외 활동을 줄이는 편이었다. 이미 물고기의 생으로도, 인간의 생으로도 환경을 바꾸며 체력소모가 크기 때문이다. 과거에 우혁이의 조상은 가급적이면 물고기의 생으로 살아왔다고 한다. 그래서 결혼을 할 때에도 인간을 만난 사례가 많지 않다고 한다. 우혁이의 가문에서는 아마 내가 첫 인간 며느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임신을 했을 때, 내가 알을 낳게될지, 새끼를 낳게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과 결혼한 물고기가 우혁이가 처음은 아니므로, 알음알음 인어 의사를 소개 받아 나는 그 특정한 병원에서만 진료를 받아야 할 것이다. 우혁이는 몸이 아프면 119에 연락할 수 없다. 가까운 인어병원에 가야 했는데, 그래서 우혁이는 언제나 인어병원이 멀지 않은 곳에 거주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전국에 인어가 꽤 분포하고 있는 편이라 서울에만 해도 인어병원이 열 곳은 넘게 있었다. 그러나 지방으로 가 살 수는 없다. 지방에는 인어병원이 한 곳도 없는 곳이 있기 때문이다. 인어가 가장 많이 서식하고 있는 곳은 제주. 그리고 일본에 그의 조상이 가장 많다고 한다. 주로 섬나라에 많이 근무하고 있다고. 해외 인어 중에는 크레타섬에 그렇게 인어가 많다고 한다.


우혁이를 만나던 시간 동안 나는 철저히 이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는 겨울에 스키도 타고, 여름에 서핑도 하고, 서로가 아플 때 감기약도 챙겨주고, 안 해본 게 없었는데 정작 우혁이가 할 수 없었던 것들이 이렇게 많았다는 걸 나는 너무 나중에서야 알게된 것이다. 그래서 우혁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두 가지 감정이 불쑥 솟아올랐다. 첫 번째는 화가 났다. 우혁이가 내게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에 대해. 어떻게 1년을 만나는 동안 자신이 인어라는 이 치명적인 비밀을 내게 감출 수 있었지? 이 정도면 거의 사기 아니야? 그런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있었지만 막상 우혁의 얼굴을 보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건 내가 등신 같은 성향이기 때문이다. 남에게 싫은 소리를 잘 하지 못하는 유약한 성격. 사람들은 내가 유약하다고 했지만, 실은 답답함의 극치를 달리는 유악한 성격인 것이다.


하루는 우리가 편의점에 갔는데 문득 새우깡을 보고 우혁이를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이 애는 이런 것도 잘 못 먹겠지?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질문을 해버리고 만 것이다.


“너 그러면 오징어짬뽕 같은 라면도 잘 못 먹겠네? 너 음식 먹을 때마다 신경 많이 쓰였겠다. 특히나 한국 음식엔 액젓류가 많이 쓰이기도 하고, 과자 같은 곳에도 해산물을 원료로 쓰이는 것들이 종종 있으니까. 지금까지 나한테 말도 못하고 너 가끔 먹을 때 있었잖아. 새우깡, 오징어볼. 뭐 그런 것들...”

“어... 실은 별로 안 좋아해.”

“안 좋아하는 게 아니라 못 먹는 거잖아. 내 입장에서 보면 사람 뼈 갈아서 과자로 만든 거니까.”

“시대야. 그렇게까지 많은 것들을 생각하면 이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더라.”


내 말에 우혁이가 새우깡 봉지를 들어 뒷면의 성분표를 보더니 너털웃음을 지으며 내려놓았다.


“붕어빵 같은 것도 실은 되게 잔인하지 않냐. 너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야, 진저쿠키는 그럼 사람 모양이니까 네가 못 먹냐?”

“......”

“이런 상황이 올 것 같아서, 말을 못했어. 네가 이런 질문들을 나한테 할까 봐. 미안해. 내가 너 성격 아니까 하루하루 널 알수록 더 입이 안 떨어지더라. 정말 미안해, 시대야.”


우혁이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 우혁이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우혁이를 질책하고 싶었는데, 우혁이가 너무 저자세로 나오니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내가 조금만 더 어렸다면 화를 내고, 어깨를 주먹으로 치고 뭐라고 책망하듯 소리라도 질렀을텐데, 내 나이가 들어가니 그저 마음 속으로 불이 이는 것만을 느끼며 내 눈앞에 펼쳐져 있는 상황을 마주하면 담담한 척 가만히 바라보고, 속으로 삭이는 것이 먼저인 인간이 되어 버린 것이다. 무엇도 섣불리 행동하지 못하고 등신처럼 가만히. 또한 이것이 지금의 나의 성격이자 성정인 것이다.




내가 이러한 성정을 갖게된 것에는 오랜 시간을 보냈던 회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회사라는, 아니 공동체의 가치가 필요한 세계에서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는 가만히 있는 것. 내가 나이기를 포기하는 것이 먼저라는 걸, 나는 너무 오랜시간이 지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근무했던 첫 회사는 식용 물고기를 기르는 양식장이었다. 학교를 졸업한 뒤 운이 좋게 학교 근처의 양식장에 채용공고가 올라와 있었다. 이전에 경력이 전무했던데다 서울에서는 내가 전공한 학과로 갈 수 있는 회사가 많지 않았다. 서울에 수두룩한 중소기업에 가려면 내 전공과는 상관없는 업무를 선택해야 했는데 당시에 내 머리로는 그것을 해낼 자신도 없었고, 내게 어떻게 미래를 설계하라는 둥의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어른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회사에는 사장과 과장님이라 불러야 하는 사모님, 그리고 진짜 과장과 대리 둘이 주로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사원으로 들어가 주로 하찮은 일을 담당했는데 그 일이 대리나 과장이 되면 안하는 건줄 알았는데 삼 개월쯤 지났을 때는 평생 이곳에선 하찮은 일만 하며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찮은 일이란 건, 내 전공과는 상관 없는 일. 학교에서 배운 지식 따위는 회사생활에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다. 물고기가 생존에 필요한 지식 같은 것보단 상품화를 시키기 위해, 생선을 더 오동통하게 만들기 위해 시키는대로 약물을 주입하고, 사료를 먹이고, 운동을 시키면 그만. 그런 것들은 공장처럼 매뉴얼이 있었고, 나는 시키는대로 뭐든 따라하면 되는 것이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창의성이 필요한 것은 오히려 인간관계였다. 어떻게 하면 기분이 변화무쌍한 저 과장과 대리의 비위를 맞출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 나의 주요 과제였던 것이다.


하루는 과장이 내게 커피를 사와달라고 심부름을 시킨다. 커피를 사오는 김에 과자도 사오고, 수세미도 사오고, 이것도 사오고 저것도 사오라고 점점 품목이 늘어나는 것이다. 회사에는 개인의 책상이랄 건 없고 그저 철제 사물함 하나가 전부인데 수세미가 왜 필요한가 싶어 물어보면 그런 건 물어보면 안된다고 짜증을 낸다. 나중에야 알았다. 서울에서 내려온 과장의 자췻방에 수세미가 다 떨어졌다는 사실을. 그리고 과장이 내게 무언가를 지시할 때에는 아무것도 질문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과장은 종종 탕비실에 채워둔 커피를 뭉탱이로 가져가기도 했고 화장실에 걸어둔 휴지를 통쨰로 가져가버리기도 했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다른 과장-사모님-은 내게 왜 제때제때 비품을 채워놓지 않느냐고 짜증을 냈다. 그 회사는 3개월의 인턴 기간을 마치자마자 나를 잘랐다. 어차피 그만둘 생각이었는데 잘리는 입장이 되니 어찌나 기분이 나빴는지 모른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 회사는 3개월 단위로 직원을 바꾸는 곳이었다는 걸. 우리 학교에 다니던 많은 선배와 동기들이 이미 그 회사를 아르바이트생처럼 지나쳐다녔다는 걸. 예전엔 과장이 도둑이라고 생각했는데, 도둑 같은 회사에 도둑 같은 직원들이 모여 있으니 그게 그거라는 생각도 들었고, 지금의 연봉에 비하면 반토막 나있던 계약서상의 월급을 생각하면 과장의 행동이 퍽 정량만큼의 가치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두 번째 회사는 첫 번째 회사의 경력을 쌓아 취직할 수 있었는데, 업종은 전혀 달랐다. 역시나 물고기를 취급하는 회사였는데, 정확히는 전국의 수산물 시장이나 희귀종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잡지사였다. 이번엔 드디어 서울에 취직을 했다고 좋아라했는데 서울에 있는 것은 잠깐, 나는 매달 전국의 수산물 시장을 돌아다녔고, 듣도보도 못한 바닷가 마을에서 물고기를 애완동물처럼 키우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수집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 회사에서 2년 남짓한 시간을 보내고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생각할 무렵 회사가 망해 버린 것이다. 회사가 망하는 징조는 사무실에 오래 앉아 있다 보면 알게 된다. 외근이 줄어든다는 것. 낯선 사람들이 사무실에 방문한다는 것. 대표의 한숨이 짙어진다는 것. 그리고 먼저 눈치를 챈 상사와 동료 직원들이 줄줄이 퇴사를 한다는 것. 월급이 밀리기 시작한다는 것. 나는 그 회사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사무실을 정리하던 직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미련스러운 사람이었는지.


그 회사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좋았는데 환경이 영 꽝이었다. 매달 취재를 갔던 마을들은 안전이 보장되지 않았고, 운전을 하지 못하면 혼자서는 들어갈 수도 빠져나올 수도 없는 곳으로 나를 보내는 것이었다. 그런 곳에 이제 갓 스물다섯, 여섯쯤 된 여자애를 보내는 것이다. 이 회사는 남자 직원은 뽑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남자애가 취재를 다닐 때보다 여자애가 취재를 다닐 때 상인들이 더 친절하게 군다는 것을 큰 이유로 들었고, 두 번째는 여자애가 연봉을 더 낮게 쳐줄 수 있어 그런다는 것이었다. 사장은 그런 이야기를 회식 자리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그때 나는 옆자리에 앉아 술을 따르며 허허 웃고 말았는데 그때는 그렇게 개구쟁이 포지션을 취하는 것이 나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웃기. 그리고 상사의 흉을 보는 일은 아직 취업도 하지 못한 친구들 앞에서나 젠 체를 하듯 털어놓기. 그게 그 당시 나의 일주일 패턴이었다. 그 회사에서는 오직 나만 지방으로 출장을 다녔다. 기획팀이라 불리우는 팀에는 나와 나보다 겨우 한 살 많은 직원 한 명. 그리고 디자인팀이라 불리는 곳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그 회사를 다닐 때에는 첫 회사의 영향을 받아 교통비며 온갖 잡다한 간식비를 회사의 법인카드로 충당했다. 어차피 출장을 가 있는 동안 쓰라고 준 카드니까. 간식도 사먹고, 점심도 사먹고, 교통비에 집으로 가는 택시비까지 결제를 하다 하루는 사장에게 크게 한 소리를 들었다. 그날은 어쩐지 아침부터 운수가 좋더니만. 지하철도 제 시간에 오고, 횡단보도도 건널 때마다 파란불로 변하는 것이 타이밍이 딱딱 좋았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평소보다 20분은 일찍 사무실에 도착했고, 사무실 안은 텅 비어 있었는데 대표실에만 불이 켜져 있었다. 대표는 나를 보더니 손을 까딱이며 부른다. 회의실로 들어오라는 것이다. 나는 주변을 두리번 거리다 불이 꺼진 사무실을 보고는 회의실로 들어갔다. 막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고 내려왔는지 사장의 주변으로 꼬질꼬질한 담배 냄새가 확 풍겼다.


“시대씨.”

“네?”

“그.. 법인카드 사용 내역서를 봤는데. 혹시 신입이라 법인카드가 뭔지 몰라?”

“알아요. 일하면서 쓰라고 주는 카드.”

“내가 교통비나 너무 먼 곳에 출장을 가면 어쩌다보니 쓰게 되는 숙박비, 그런 건 이해를 하겠어. 그런데 커피 사마시는 돈까지 회사가 내야 해?”

“아, 그거 저 혼자 마신 거 아니에요. 취재하면서 아저씨 사드리면서 제것도 산 거에요.”


실은 아저씨고 뭐고 상대방을 사준 적은 없다. 케이크 하나, 커피 한 잔 주문하면 커피 2잔 값이니까. 영수증을 받을 때에는 내역이 나오지 않은 버전을 받는다. 이런 재치는 첫 회사의 경험을 톡톡히 활용했다. 이 회사는 처음부터 경력직을 뽑았는데, 그렇다고 해서 경력이 너무 많은 직원을 원하지 않았다. 적당히 복사기 돌릴 줄 알고, 전화 잘 받을 수 있는 사근사근한 여자 직원. 그래서 나는 회사가 원하는 인재상이 되어주었다. 그런데 회사가 중고신입을 뽑을 때는 그만큼의 요령도 생긴다는 것 쯤은 감안해야 하는 것 아닌가? 어차피 내년에도 연봉은 동결시킬거고, 야근수당이며 출장 갔다 다음날 주말까지 활용해 돌아와야 하는 일정까지 포괄임금제로 산정할 거잖아.


“그럼 아저씨만 사드려. 왜 시대씨 것도 사고 그래.”

“그럼 모양이 좀 이상하잖아요.”

“뭐가 이상해.”

“왜 제가 나서서 가게 아저씨들 커피를 사 드려야 하는데요? 기프티콘이나 상품권으로 전달해줄 수도 있지.”

“현장 분위기가...”

“현장 분위기? 제가 사근사근하게 웃고, 아저씨들 비위 맞추면서 커피 내려드리는 그런 분위기?”

“시대씨, 지금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 거야?”

“커피를 아예 안 사던가, 사던가. 그렇게 하겠다는 말이에요.”

“시대씨 은근히 반골 기질 있구나?”

“네?”

“나도 한 때 그랬거든. 그래서 알아. 근데 시대씨. 반골이 되려면 조건이 하나 더 필요해.”


사장은 내게 이런 말까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며 손목에 찬 시계를 조금 느슨하게 풀었다. 그리고는 덧붙였다.


“학교 다닐 때 공부 좀 잘 하지 그랬어. 아니면 좀 뭘 알고 전공을 선택하던가.”


사장의 말에 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장은 내게 더 이상 할 말이 있냐는 투로 눈썹을 꿈틀거렸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에는 사장을 오래 노려보았고, 다음날에는 다른 회사를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회사를 가더라도, 사람들은 다 같은 생각을 할 테니까. 오래도록 그 때의 일을 마음에 담아두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부조리하거나 불합리한 일이 발생했을 때 그 말을 마음 깊이 새겼다.


다 내 선택이 이렇게 만들었다는 그 말.




“시대씨, 올해 경기가 많이 안 좋은 건 알지?”


올해로 7번째 연봉협상이다. 도대체 ‘협상’이라는 단어는 어떤 선택을 한 사람에게 어울리는 걸까? 지금까지 회사를 다니면서 ‘협상’을 했다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다. 다들 통보 내지는 법정 최저시급에 맞게 올랐다는 것 뿐. 물가도 협상 없이 쭉쭉 오르고, 연봉은 협상 없이 통보에 가깝다. 오르지 않는 것은 오직 내 전공처럼 잘못 선택한 주식 뿐이다.


지금 나와 마주보고 있는 저 남자. 이마에서 정수리까지 양쪽으로 털이 빠져 허옇게 길이 나 있는 저 남자는 이 아쿠아리움에 있는 지원팀 팀장이다. 내가 다니는 아쿠아리움은 서울과 부산, 그리고 제주에 각각 세 개의 지점이 있고, 우리팀 팀장이 내가 다니는 회사-하청업체-의 행정과 사무, 그리고 경영을 함께하고 있다. 사람들은 대형 아쿠아리움이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하나의 큰 기업체가 운영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하청업체들이 줄줄이 붙어 있는지 아마도 모를 거다. 그게 싸게 치기 때문이다. 정직원 몇 명을 고용하는 것보다 파트너사랍시고 하청업체 몇을 두는 게 낫고, 그 업체의 대표는 나 같은 쫌쫌따리 직원에게 기업과 계약한 월급과는 상반되게 후려치기를 해 재계약을 한다. 우리는 그 하청업체 중에 하나다. 특히나 내가 맡은 지중해존은 우리 회사에서 관리를 들어간다. 기획 전시를 할 때에도 특별한 행사를 준비할 때에도 하청업체별로 실적을 낸다. 누가누가 더 마케팅을 잘 했느냐에 따라 업체별로 점수를 받고, 이를 바탕으로 다음해의 계약이 결정된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 정규직이다. 말이 정규직이지 계약이 끝나면 권고사직 대상이다. 가끔 생각한다. 이 나라에서 구인구직란이 해소되었다고 말할 때는 도대체 무엇을 지표로 삼는 것인지.


우혁에게는 아직 그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이 바닥 돌아가는 사정을 자세히까진 알지 못하는 우혁이는 내가 아쿠아리움의 정직원으로서 복지는 복지대로 다 누리고, 나중에 우리가 결혼을 하게 되면 육아휴직을 쓸 때도 가뿐하게, 평생을 걱정 없이 일하며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을 거다. 그러나 우혁이가 사는 세계와 내가 사는 세계는 많이 다르다. 우혁이는 가끔 내가 연차를 쓰지 못하거나 회사의 눈치를 볼 때면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 정당한 권리를 왜 눈치를 봐가냐는 거였다. 가끔 우혁이가 그런 말을 할 때면 나 역시 우혁이의 선배가 우혁에게 했다는 말들-저 엠지새끼-이 이해가 되곤 했다. 나도 우혁이가 다니는 회사에서 일을 한다면 그런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겠지. 법적으로도 보장된 권리니까. 그런데 법적인 것과 실제 야생 같은 이 회사 인간들의 문화는 다르다는 거다.


'학교 다닐 때 공부 좀 잘하지 그랬어. 아니면 그 전공 선택하지 말던가.'


또다시 오래 전 다니던 회사의 대표가 내게 말했던 그 말을 곱씹게 된다. 이건 상처도 아니고, 추억도 아니고. 그냥 사실이다. 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런 생각을 마음에 품고 산다. 우혁이를 만나는 동안에도 늘 그것을 따지게 되는 게 가장 힘들었으니까.


우혁이는 죽었다 깨어나도 나를 이해하지 못할 거다. 내가 이 일이 아닌 부업에 목숨을 거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내가 결혼을 한다고 하니 어른들은 내게 어차피 곧 애기가 생기면 자연스레 몸을 쉴 수 있는데 여자 직업이 뭐가 걱정이냐고 한 소리를 얹고 지나간다. 지금껏 살아오며 내 전공과 직업이 여자에게 딱이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다.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아이는 사회와 함께 키우는 것이고, 나는 이 사회에 소속된 인간으로서 돌아갈 자리가 있어야 한다.


“경기야.. 뭐... 늘 꽝이죠.”


내 말에 팀장이 허허 웃는다. 저 웃음의 의미는 크게 두 가지다. 그런 건 이제 직감과 육감으로 안다. 올해 연봉이 동결이거나. 동결이거나. 동결. 이미 마음 먹은 상태였기 때문에 동결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마침 과일도 동결건조 과일을 즐겨 먹고 있던 차였으니까.


“있잖아, 시대씨. 오늘은 조금 미안한 이야기를 하게될 것 같아. 원래는 대표님이 직접 오셔서 이야기해주신다고 했는데... 못 오겠다고 하시더라.”
“회사에 무슨 일이 있어요?”


불길하다. 자고로 이 회사의 대표는 있는 듯 없는 듯 해야 희소식인데. 대표가 움직인다는 건 회사에 무슨 안 좋은 일이 벌어졌다는 거다. 벌어지는 중이었다면 그것도 희소식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우리가 연봉 재계약이 3개월 정도 늦춰졌잖아. 아쿠아리움 측에서 시간을 이상하게 질질 끌더라.”

“혹시...”

“맞아. 우리가 10년 정도 같이 일을 했으니까 이번에 업체 바꿀 때도 됐지. 경쟁업체에서 우리보다 몇 천은 적게 예산을 불렀나봐. 갑질하는 입장에선 예산 줄여서 입찰해야 자기네들 실적이니까.”


그러니까 지금 팀장 말은 다음달부터 이 아쿠아리움에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다. 권고사직 통보를 하고 있다는 거다.


“그러면...”

“다음달까지. 그 전에 면접 보러 다닐 일 있으면 시간 좀 빼줄게.”

“아니, 갑자기 한 달 전에 이렇게 말씀하시면...”

“우리도 기다렸어. 지난주에 일방적으로 통보 받은 거야.”


전년도 같았으면 탕비실에서 탈의실로 돌아갈 때 손에 무거운 연봉계약서를 들고 나왔을 텐데 이번엔 빈털터리다. 책상 하나 없는 사무실. 아쿠아리움에 3년 남짓한 시간 동안 근무하면서 내 짐은 오로지 캐비닛 하나 정도다. 회의실도 하나 없어 탕비실에서 간단하게 조례와 종례를 한다. 조례와 종례라고 하지만 한 팀에 겨우 다섯 명 남짓한 팀에서 안부 인사 정도 묻는 게 전부다. 나는 탕비실에서 팀장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탈의실로 향한다. 여자 탈의실 안쪽에는 이제 갓 입사한 지 6개월된 신입사원 연지씨가 얼굴을 가린 채 울고 있다.


연지씨는 유니폼을 벗지도 않은 채 어깨를 들썩인다. 연지씨는 직전 회사에서도 1년 경력을 채우지 못했다. 우리 회사 면접을 볼 때만 해도 1년 경력을 채우지 못해 서류에서 탈락한 회사가 수두룩했다고. 자기는 나름대로 사정이 있어 회사를 나오게 된 건데, 다른 회사들은 그런 개인의 사정보단 눈에 보이는 것만을 지표로 삼으니 어려운 점이 많았다고 했다. 연지씨가 지난 회사를 그만 둔 이유는 직장 내 괴롭힘을 견디지 못해서였다. 하루가 멀다하고 상사의 담배 심부름, 스타킹 심부름을 했다고 했다. 회의를 할 때면 사생활을 집요하게 질문받았고, 잔업을 처리하지 못하면 퇴근이 어려운 구조였다고 했다. 그걸 참고, 참다 누군가 터트렸는데 그걸 터트린 사람은 11개월을 꾹꾹 참은 연지씨가 아니라, 연지씨의 바로 선임에 있던 사원이었다고 한다. 그는 1년을 채우자마자 그 선배를 신고 했고, 그 선배를 신고함으로써 팀이 해체되는 일이 벌어졌고, 연지씨는 인턴이었던 3개월을 제외하고 8개월을 경력으로 이 회사 저 회사 면접을 보러 다니게 된 것이다. 그렇게 어렵게 연이 닿은 회사가 이 회사인데 이제 6개월에 권고사직을 해야 하는 것이다.


“대리님. 저는 모르겠어요. 요즘 제 또래 사람들은 창업이니 뭐니 하면서 오히려 스스로 사직서를 낸다고 하는데, 저는 꾹꾹 버티거든요.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솔직히 회사는 아르바이트 한다는 생각으로 다녀요. 근데 가볍게 다니는데 꾹꾹 마음 참으면서 다닌다고요. 그런데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자꾸 일어나요? 왜 내가 들어와서 이렇게 된 거예요?”


나는 연지씨의 어깨를 토닥거리다 탈의실 바닥 한 가운데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연지씨의 이름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연지씨가 탈의실에 들어오자마자 집어 던진 것이 분명하다. 나 역시 몇 년 전에 내 이름표를 받가에 집어 던진 적이 있었으니까.


“아이고. 운이 없었다고 생각해야지.”

“왜 나한테만 자꾸 운이 없는데요?”

“모르지. 그냥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그때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우혁으로부터 온 연락이었다. 우혁이는 내게 결혼을 위해선 몇 가지 준비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 첫 번째는 내가 인어의 세계에 종속되기 위해 맞아야 하는 예방주사의 목록이었다.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주사를 맞는다. 탯줄이 끊어진 순간부터 각종 바이러스와 면역 질환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자라는 동안에도 유치원은 물론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도 예방주사를 맞히고 정기적으로 건강을 점검해 준다. 내게 첫 주사의 기억은 다섯 살 때였다. 작은 병원이었는데 엄마를 따라 들어간 진료실에서 코를 찌르는 소독약 냄새에 신기해하면서도 얼굴을 찌푸렸던 기억. 하얀 장갑을 낀 의사선생님이 이리저리 손재간을 동원해 내 팔 한쪽에 푹 찔러 넣었던 주삿바늘. 처음엔 따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중엔 그 날카롭고 긴 것이 내 살을 파고들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뿌리치고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푸욱하고 바늘이 내 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곧이어 두터운 솜이 구멍난 팔한 쪽에 얹어졌다. 자, 이렇게 문지르다 피가 멎으면 떼면 돼요. 의사고 간호사고 어른들은 내가 꺄르르 웃을 때에도 뿌엥 울어 버릴 때에도 뭐가 웃긴지 재밌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때에는 가만히만 있어도 자라고 있는 내게 정기적으로 주삿바늘이 들어왔는데, 이제는 내가 직접 내 주사를 챙기지 않으면 누구도 내게 생존에 필요한 면역력을 키워주지 않는다. 어릴 때에는 주사 맞는 게 세상에서 가장 무서웠는데,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주사는 오히려 간지러운 수준의 아픔이었다. 인생사 세상사도 주사처럼 미리 따끔하고 말 수 있다면, 그 잠깐의 예행연습으로 세상에 잘 소속되는 방법을 알 수 있다면 좋을텐데. 언제나 그렇듯 바늘보다 사람이 찌르는 아픔이 더 오래 쓰라린 법이다. 사람으로부터 당하는 배신은 어린 아이를 달래던 의사의 손재간보다 더 요물지고, 그 따끔함의 정도는 빌딩 한 채의 뾰족함보다 날카롭다. 무엇보다 사람이 내는 상처는 예방주사가 아닌 그냥 상흔이다.


우혁이 내게 보내온 장문의 메시지에는 앞으로 인어 종족의 소속이 되기 위해선 내가 맞아야 하는 예방주사의 리스트가 적혀 있었다. 그러니까 인어병원에서만 맞을 수 있는 특별한 각종 예방주사들. 나로서는 평생 이렇게나 많이 맞아야할까 싶은 수준의 목록이었다. 메시지를 보자마자 나는 우혁에게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휴대폰 너머 우혁의 목소리는 숨이 찬지 헐떡거렸다. 뭘 하고 있느냐고 물으니 이제 막 러닝머신에서 내려왔다고 덧붙였다. 우혁이는 탄력근무제라 항상 일찍 퇴근을 하는 편이다. 우혁이가 내게 왜 퇴근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는데 연락이 없었냐고 묻길래 나는 권고사직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차마 하지 못하고, 부사수와 갈등이 생겨 잠시 면담을 했노라고 말해주었다. 우혁이는 내 말에 그렇구나, 하고는 내 눈치를 살피듯 괜찮느냐고 물어왔다. 아니, 괜찮은 것 보다는...


- 이게 다 뭐야?

- 미안. 사실 내쪽에서 다 조심하긴 하는데 그래도 혹시 몰라서...

- 이걸 다 맞아야 한다고?

- 그 편이 너한테도 안전하지 않을까?

- 너 전에 만났던 친구들한테도 그랬니?


내 물음에 우혁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제야 아차, 싶었다. 우혁이와 사귀기기 전, 장난삼아 묻고 답했던 질문이 있다. 공원이었나, 놀이터였나. 기둥이 긴 나무와 정리되지 않은 잡초를 질끈 밟으며, 우리는 숲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고 있었다. 조심해. 그날 나는 괜히 우혁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있었고, 치마 아래로는 맨 다리를 드러내고 있어 발을 디딜 때마다 풀잎에 다리가 긁혔다. 간질거리는 느낌에 푸하핫 웃으며 벤치로 가는데 우혁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주변을 살폈다.


"뭐, 어때.“


내 말에 우혁이가 한숨을 쉬었다. 우혁이는 평소에도 과하게 조심성이 있는 캐릭터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웃고 넘길 말들도 괜히 진지하게 귀기울여 듣는 캐릭터. 나는 그게 우혁이의 장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연애를 하면서 그게 우혁이의 단점이기도 하다는 걸 깨달았다. 살짝 짜증 섞인 목소리로 우혁이를 올려다보는데 우혁이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 발목을 닦아주었다. 결벽증인가?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간 생각이었다.


"그래도. 검증되지 않은 바이러스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야, 이 정도는.... 너 중학교 때 수련회 같은 거 안 가봤어?"

"우리는 그때보다 더 나이가 들고 있잖아. 면역력이 언제 어떻게 떨어질지 모른다구."


우리는 벤치에 앉아 술래잡기처럼 서로의 비밀들을 조금씩 캐내기 시작했다. 우혁이가 가진 단점이 그 당시에 내 눈에는 장점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우혁이가 주변 환경에 지나치게 예민해서 나오는 무의식적인 행동들은, 이를테면 손수건을 가지고 다닐 정도의 세심함으로 읽혔다. 길을 가다가 맨발에 샌들만 신은 발뒤꿈치를 천천히 닦아줄 수 있는 남자. 그런 사람이라면 평생을 함께해도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나?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내게는 그런 사소한 점들이 감동 포인트였다. 우혁이와 만나던 2년 동안 어쩌면 그런 면면들이 나로 하여금 그 애에게 나의 내밀한 이야기들을 조금 더 꺼내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회사에서 내가 어떤 일들을 겪고 있는지, 내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이야기하는 것은 여전히 조심스럽다. 그러나 나의 작은 비밀들. 회사에서는 어른인 척 행동하지만 실은 머릿속으로는 수많은 상상력이 풀가동되고 있다는 사실, 엉뚱하고 기발한 생각들이 맴돌고 있다는 그런 사실들에 대해 나는 우혁이를 만날 때마다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우혁이도 내게 비밀을 털어놓았었지. 내가 먼저 나의 작은 비밀을 털어 놓았을 때 우혁도 내 눈치를 봐 가며 털어놓은 비밀들이 있다. 나의 작은 비밀은 내 엉덩이골 사이에 손톱만 한 큰 점이 있다는 사실. 거울을 볼 때마다 나는 그 점 때문에 내가 우스꽝스러워 보인다고 몇 번이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래서 그 점을 내보일 때면 나는 평소보다 몇 배는 겸손해진다. 이를테면 목욕탕이나 침대 위 같은 곳에서. 우혁의 작은 비밀은 코가 개코라는 거였다. 남들보다 후각이 발달해 거리에서 스쳐지나가기만 해도 그 사람이 똥을 막 누었는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 있다고. 우리는 그런 더러운 이야기에 킬킬 거리면서 웃다가, 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끝내 관념적인 이야기를 해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썸을 탈 때마다 내가 사람들에게 묻는 공식 질문.


”너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지금껏 사랑이 무엇인 거 같느냐는 질문에 수많은 이성이 답안지를 써냈다. 대체로 지긋지긋한 답이었다. 사랑은 숭고한 거야. 일종의 희생인 거지. 나의 첫 남자친구가 해준 말이었고, 사랑은 숭고하다. 사랑은 남을 아끼는 거다. 사랑은 소중한 거다 등등. 언제나 사랑은 화려했고, 순수했고, 보통의 사람이라면 해낼 수 없는 영웅담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때마다 나는 타인을 향한 사랑은 없고, 타인을 사랑하는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지론을 펼쳤다. 가끔은 그런 생각도 해. 누군가를 좋아하는 나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다가도, 어느 날엔 그것도 없고 '자아'만 있는 게 아닐까.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기적인 동물인데 어떻게 타인을 위해 먼저일 수 있곘어? 내 질문에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런 게 아니라고 했다. 술자리에서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때로 말싸움으로 번지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을 뿐이었다. 경험한 적 없고,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믿을 수 있어? 다들 사랑하는 척, 남들처럼 연애하는 척. 그런 척 하면서 살아가는 거 아니야? 내가 그런 말을 던지면 사람들은 끝내 포기하고 만다. 나를. 살아오는 내내 그렇게 자라왔다.


나는 그날 벤치에서 우혁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졌다. 허벅지 한쪽을 들어 옆에 앉은 우혁의 다리 위에 척 걸치고는 물었다. 너는 어때?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둥실. 두둥실. 둥둥.

생각에 잠긴 우혁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자꾸만 머릿속으로 그 속삭임이 울려 퍼진다. 둥실. 두둥실. 둥둥. 우혁의 옆 모습은 앞모습과 다르게 생겼다. 옆모습은 개구쟁이 도깨비 같은데, 옆모습은 물고기를 닮았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물고기.


"사랑은.. 아픈 거야."

"뭐?"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다. 사랑이 아파? 어째서 아파? 왜 아파? 너 어디 아파? 내 물음에 우혁이는 씁쓸하게 웃어보일 뿐이었다.


"끝을 알고 시작하는 사랑만큼 별로인 게 없거든."


그때 나는 우혁이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우혁이의 대답이 여느 다른 남자애들과는 달랐으므로 그 대답 하나에서 매력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얘는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 쉽게 버림받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 그게 우혁이의 고백을 받아준 단 하나의 이유였다.


버림받는 게 두렵느냐고 묻는다면 세상에 어느 누가 버림 받는 것을 두렵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혁이를 만나던 당시에 나는 이제 막 새로운 회사에 입사한 지 1년차가 되었을 무렵이었다. 모든 게 낯설었다. 사람에게 버림을 받는다는 트라우마는 인생을 살아가며 크나큰 시련이 있어 생기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원치 않게 이동해야 했던 회사. 계속된 사람들과의 만남과 헤어짐. 그런 것만이 아니더라도 세상은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나를 이방인 취급 하는 것 같았다.


학교를 다닐 때에는 순번을 매겨가며 내가 마주할 수 있는 친구들이 달라졌고, 성인이 되어 대학교를 가고, 회사를 가며 점점 내가 나아갈 수 있는 범위가 좁아져갔다. 어쩌면 지금 내가 선택하려는 이 결혼은 정말로 한 가정의 소속감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이 세상과 시대에 어울리고 싶은 사람이 되고싶어, 세상으로부터 이방인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날 우혁이와 함께 걸었던 숲길의 끝엔 대학가가 있었고, 하필이면 그 대학가에는 타로와 사주를 보는 가게가 즐기해 있었다. 서로가 연애를 할랑말랑 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우리는 재미삼아 근처의 가게에 들어갔다.


”사주 보는 거 좋아해?“


내 물음에 우혁이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하고는 상관없기도 하고.“

”아, 너 이런 거 안 믿는 구나.“

”아니, 그냥... 취향이 안 맞는다고 해 두자.“


그때 우혁이가 내게 그렇게 말을 할 때 나는 우혁이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대답을 되게 특이하게 하는 편인네. 우혁이는 자신이 답하기 곤란한 질문이 있을 때면 대답을 기가 막히게 이상하게 한다.


사실 우혁이와 함께 갔던 그 타로집은 내가 20대 동안 주구창장 방문했던 가게였다. 우혁이를 만날 때 내 나이가 나이인만큼 타로점의 운도 중요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게에 들어가니 알록달록한 천을 이어붙인 로브를 걸친 아주머니가 가게 안쪽에서 나왔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아는 척 눈짓을 했다. 나는 황급히 모르는 척 해 달라는 얼굴로 눈을 찡긋했다.


그때는 몰랐다. 사주는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거라는 걸. 우혁이가 그때 내게 했던 대답은 물고기는 사주와 관련이 없으니 사주의 영향을 받지 않을 거라는 거였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우혁에게 궁합이나 보자며 데려간 것이다.


”남자친구?“


아주머니는 가게 안쪽에서 연기가 폴폴 나는 주전자를 가져와 우리 앞에 놓아두었다. 그리고는 끓는 물 주전자를 작은 주전자 위에 부었다. 찻잎이 우러나오고 금세 찻잔은 붉게 물들었다. 나도 모르게 평소처럼 찻잔을 만지다 화들짝 손을 뗐다.


”여기 실은 단골 아니지?“


우혁의 말에 나는 얼굴까지 빨개지며 손을 저었다. 아주머니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카드를 펼치고 우혁에게 몇 장을 뽑아보라고 말했다. 뽑고, 뽑고, 또 뽑고. 아주머니는 헤엑하고 놀라더니 나와 우혁이를 번갈아봤다.


”이번에 제대로 왔네.“


아주머니의 말에 테이블 아래로 내가 아주머니의 발을 툭 쳤다.


”뭐가요?“


우혁이가 다시금 우리 두 사람을 수상하게 쳐다본다. 아주머니와의 인연이 여간 두터운 게 아니었으니 이건 뭐 숨길래야 숨길 수가 없다. 우혁이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나와 아주머니를 번갈아보길래 나는 시선을 돌리겠다며 카드 한 장을 가리켰다. 우혁이가 마지막에 뽑은 카드였다. 커다란 바늘이 하트 모양을 찌르고 있는 카드.


”이... 이건 뭐예요? 뭐, 사랑에 정복됐다. 뭐 그런 거?“

”정복은 무슨...“


우혁이는 이제 킬킬 웃는 여유까지 부린다. 아까 사랑이 아프니 뭐니 진지하게 지껄일 땐 언제고, 또 이런 곳에 오면 괜히 남 얘기인 척 하는 게 우혁이의 재주다. 우혁 뿐만이 아니라 다른 남자애들도 실은 사주와 타로에 관심이 많으면서 그런 건 여자들이나 관심을 쏟는 일이라면 심드렁한 척 한다.


”비밀.“


아주머니는 카드를 보더니 제법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턱밑을 매만지는 버릇은 아주머니가 뭔가 고민이 있을 때 하는 제스쳐였다.


”비밀이요? 저희한테 말해줄 수 없다는 말씀이세요?“


내 물음에 아주머니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손끝으로 우혁이를 대뜸 가리켰다.


”자기, 무슨 큰 비밀이 있지? 그게 들킬까 시대한테, 아니. 이 아가씨한테 벌벌 떨고 있는 게 있을 거야. 그게 뭐야?"


아주머니는 목소리를 낮게 낮추며 우혁에게 말했다. 순간 우혁의 머리칼이 빠짝하고 서는 것 같았다.


”야. 너 뭐 있어?“


내 물음에 우혁이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뭐야. 너 진짜 뭐 있어? 재차 묻자 이번에는 이런 건 재미없다며 대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버렸다. 같이가자며 가방을 챙기는데 아주머니가 내 손목을 낚아챈다.


”시대씨. 저 애 말이야, 꼭 만나야겠어?“


지금껏 내게 타로점을 봐주며 아주머니가 나를 말린 적은 없었기에 나는 놀란 표정으로 가방을 바닥에 툭 내려놓은 채 멈칫했다.


”왜요? 뭐가 안 좋아요?“

”결혼운이야. 잘못하다가 저 놈한테 시집가게 생겼다고.“

”그럼 좋은 거 아니에요? 나 결혼에 목매는 여자, 이시대잖아요.“
”근데, 같이 나온 카드가 이상해. 내가 이 자리에서만 십오 년을 점을 봤어. 타로카드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은근 들어맞는 기운이 있다니까. 딱 보면 알아. 쟤 너한테 뭐 숨기는 거 있어.“

”곧 알게되겠죠. 아직 사귀기도 전인데...“

”그냥 오늘 헤어져. 그게 좋겠어.“
”아, 왜요!“

”너는 저 애의 비밀 때문에 평생 마음 편하지 못할 거야. 그러니까 지금...“

”그 정도예요?“

”뭔지 몰라도, 이 카드는 거짓말 안해. 내가 이렇게 권장하는 거 봤어?“

”아니... 그래도.“


그때 헤어졌어야 했다. ‘끝을 알고 시작하는 사랑만큼 아픈 게 없다’는 우혁이의 말은 어쩌면 내게 자신이 인어라는 사실을 고백한 것이 처음이 아니었다는 걸 나는 이제야 안다.




끝을 알고 시작하는 사랑.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라도 나는 끝이 난 뒤에 시작하는 사랑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언제나 결과가 나온 뒤부터 진짜 내 진심을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스무살이 되어 대학교를 다니던 무렵부터 독립을 했다. 내 첫 집은 학교 안에 있는 기숙사였고, 다음으로 학교 근처에 있던 자취방. 서울에 올라와 사회초년생 시절에는 고시원과 쉐어하우스를 차례로 지나왔다. 그리고 지금의 오피스텔에 오기까지 많은 집을 거쳐왔다. 다양한 집을 선택한 이유는 나름대로 있었다. 당시의 경제적인 상황도 있었고,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기도 했다. 고시원에 들어갈 때에는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며 회사를 다녔는데 나름대로 독하게 마음을 먹은 것이었다. 내가 머물렀던 집마다 각각 장단점이 있었고, 머무르는 동안은 단점만 보였던 것들이 떠날 때가 되어서야 장점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헤어지는 걸 잘 하지 못한다.


”집을... 알아봐야 하는데.“


회사에 휴가를 내고 우혁이가 건넨 리스트에 따른 주사를 맞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우혁이가 차를 타고 나를 집 앞에 데려다주며 중얼거렸다. 집을 알아봐야 한다는 말에 문득 정신이 들었다. 집에서 아쿠아리움까지는 지하철을 타고 10분 정도. 지하철 역에서는 한참이나 올라가야 하는 외진 곳에 있지만 집값이 싸 선택하게 되었다. 처음 집을 선택할 때에는 이동 거리를 가장 중요시 했다. 몇 번 집을 옮기다 보니 출퇴근거리가 너무 먼 곳은 좋지 못했다. 그렇다고 집값 때문에 가까운 곳에 살 수는 없다. 회사는 언제나 땅이 비싼 곳에 위치해 있었고, 내 능력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회사 근처에 집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건 우혁이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우혁 역시 회사 때문에 인천에 살고 있었다. 우혁이야말로 내가 꿈꾸던 회사에서 걸어서 5분 로망을 실현한 것이다. 우혁이네 가족은 집이랄 건 따로 없이 해양생물들이었으므로 본가랄 것도 없다고 했으나 우리가 결혼을 하게 된다면 함께 살아야 하는데 도무지 위치가 고민이 되는 거다. 매번 이사를 갈 때마다도 고민을 하는데, 이제는 두 사람의 회사 거리까지 생각해야 하는 꼴이 된 것이다. 원하는 곳을 마음대로 정해 원하는 조건으로 갈 수도 없다. 그러려면 돈이 어마어마하게 많아야 하고, 노후에도 가능할지 아닐지 알 수 없으니까.


"시대야. 인천과 서울 둘다 이동하기 편한쪽이 낫지 않을까? 아님 나는 서울도 집만 구할 수 있으면 차를 타면 되니까 괜찮은데..."


우혁이의 질문에 나는 얼마 전 서울에 알아봤던 집들을 떠올렸다. 혼자서 살기에 겨우 족한 집들만 눈에 들어왔던 기억. 신혼집이 그럴듯하게 넓어야 한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좁은 집에 살고 싶지도 않았다. 이런 미래를 보려고 지금까지 열심히 하루하루를 보냈던 건 아니었는데. 인스타그램 속 사진을 보고 있으면 내 또래의 결혼한 사람들은 셀프 인테리어니 미니멀라이프니하며 자신들의 알콩달콩한 신혼생활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런 게 부러웠는데, 나도 그런 걸 하고 싶었는데 현실은 나는 회사에서 권고사직을 당한 입장이고 남편될 사람은 이제 와 인어라고 주장하고 있고, 서울에서 회사를 다니면서 서울에 집 한 채 구할 수 없다. 그러면서 안정적인 생활을 기대하지 말고 결혼을 서두르라는 말만 수두룩하다. 이건 생존의 문제인데.


차 앞좌석에 앉아 멍하니 창 밖의 해가 진 풍경을 바라보는데 슬슬 이마에 열이 오르기 시작한다. 어지럽다. 생각해보니 요즘 온통 신경 써야 하는 것 투성이라 아침부터 제대로 뭘 먹지 못한 것 같다.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떴다. 현실은 그대로다.


”집 얘기는 나중에 하자. 뭐 당장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아, 그리고 상견례 말인데...“

”어우, 끝이 없구나.“

”야, 이시대. 결혼 얘기는 니가 먼저 꺼냈다.“

”뭐 나아지는 건 하나도 없는데 갑자기 뭔가 물밀 듯이 밀려온 느낌이야. 겁이 나.“

”원래 그렇게 결혼하는 거래. 선배들이 그랬어.“

”무슨 선배. 네 물고기 종족들? 아님 갑오징어들?“


문득 머릿속에 우혁이가 물고기로 변신한 모습이 떠올랐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갑오징어에게 물고기 사료 영업을 하는 우혁이라니. 그러고 보니 우혁이가 물고기로 변한 모습을 한 번도 눈앞에서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우혁이는 바닷속에 들어가 마음만 먹으면 물고기의 형상으로 바뀔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우혁이는 물고기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한다.


"니네 부모님 때는 좋았겠다. 부모님 둘다 인어라며. 그러면 당장 신혼집 걱정은 없었겠어. 돈이야 통장에 넣어두면 되고, 잠은 물 속에서 자면 됐으니까."

"맞아. 그래서 우리 부모님도 한국 물가도 오르고, 집 생각해서 웬만하면 인간 여자 말고 인어 여자 만나라고 하더라."


우혁이의 말에 또다시 피식 웃었다.


”어떡하냐. 우리 운명이 잘못했네.“

”그렇게 생각해?“


우혁이가 카시트를 조금 뒤로 넘기며 편안히 누우라고 했다. 생각해보니 우혁이를 만나는 동안 속상한 일이 있거나 몸이 안 좋을 때마다 우혁이는 나를 데리고 어디 멀리 가지 않고, 그저 한강 둔치에 이렇게 차를 세워 두고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듣고만 있거나 누워 아무 생각도 말라고 했다. 그런 시간들을, 네 번의 계절을 보냈지. 나는 우혁이의 그런 여유로운 마음가짐이 좋아 우혁이와 결혼이 하고 싶었지. 나와는 결이 맞는 듯 다른 사람 같아서.


”시대야. 나는 내가 하필 많은 국적 중에 여길 선택한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 내가 여기 있으니까 어쩌다 너랑 부딪힌 거 아니겠냐. 그거 외에는 여기 사는 거 하나도 재미없어. 솔직히 여기 바다는 너무 T스러워서 지중해로 갈까 싶었다니까.“


우혁이의 말에 나는 소리내어 깔깔거리며 웃었다. 덕분에 열감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았지만.


”인정. 서울에서 밥벌이하는데 집은 경기도까지 넘어 가야 하고. 이제 어쩌면 좋냐, 우리.“

”근데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모르겠지만, 그렇지만 괜찮을 거야. 시대야. 우리 너무 겁먹지 말자.“


그게 되게 별거 아닌 말인데, 이상하게 우혁의 말을 듣고 있으면 내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우혁이는 언제나 나를 붕 뜨게 만든다.


"그러니까 부모님께 연락 드려. 인간 문화 따라서 상견례는 해야지. 우리 부모님 지금 바다 건너 헤엄쳐 오고 게셔."


근데, 잠깐만.


"야.. 지금 이거... 너 이거... 프로포즈를 이따구로 하는 거냐?"


내 말에 우혁이가 움찔 놀란다. 뭐야, 진짜 프로포즈야? 나는 카시트에 기대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는 우혁이를 노려보았다. 우혁이가 내 눈치를 슬 보더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낸다.


"아니... 그러니까... 흐음..."


우혁이의 품에서 나온 건 진주로 자개를 박아 놓은 반지다.


”이거 내 친구들이 직접 수집해온 거다. 이 진주는... 진짜 소중하게 만들어진 거야.“

”야.....“


이어 우혁이가 내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나는 헉하며 입을 쩍 벌렸다.


”야....“

”너무 감동 받지 말고.“

”야....“

”어, 시대야. 휴지 줄까?“

”지금 내가 휴지가 필요해 보여?“


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우혁에게 볼멘소리를 했다.


"내가 원한 건 이렇게 차에서 담백하게 프로포즈를 하는 게 아니었다고. 야, 이시대가 결혼하는데 적어도 풍악은 울려야될 거 아니야!”

“뭐.. 뭐라고?”

“야, 너 뭐 그런 거 없어? 음악 연주라거나. 어? 아니면 케익이라던가. 하다 못해 양식집에서 고기라도 썰어야지. 이 대망의 잔칫날에!”

“야... 이시대. 너 진심이야?”


우혁이가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지금 매우 진지하다.


“그래! 진심이다. 너 나를 다른 여자들과 다르게 본 건 아니지? 너 이거, 다시 해!”


우혁이가 기가 막히다는 듯 허, 하며 웃었다. 나도 어깨를 들썩이며 웃다 눈물이 찔끔 나왔다. 손가락을 내려다보니 나의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가 끼워져 있다.


“야. 이거 내 친구들이 얼마나 깊은 바다에서 구해온 건줄 알아? 이걸 반지로 만들려고 친구들한테 내가 아끼는 게임기도 넘겼는데!”

“됐고! 다시 해! 마음에 안 들어.”


나는 우혁이에게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자꾸만 눈에 힘을 주는 모양새와 다르게 입은 웃고 있다. 몸에 긴장이 탁하고 풀렸다. 그래, 오늘은 이렇게 웃고 넘기자. 내일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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