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지앵 인테리어 08
‘거실(巨室)’이란 한자어 그대로 ‘큰(巨)’ 방이다. 이렇게 방의 크기에 따라 공간을 구분하게 된 것은 근대 이후 한옥 주거가 빠르게 줄어들고, 유럽식 주거 형태가 이식되면서 부터인데, 그 역시 정확한 이식은 아니었다. 근대 이후의 유럽은 파리를 중심으로 크기가 아닌 ‘기능’에 따라 집의 공간을 구분하는 문화가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크기를 기준으로 ‘거실’의 옛날 이름을 찾아본다면 우리에게는 ‘마당’이고, 유럽인에게는 ‘홀(Hall)’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주거에서 ‘마당’은 사라진 지 오래고, 유럽인에게도 홀은 이제 신발장을 놓는 현관 공간으로 축소되었다. 표준형 아파트 주거가 보편적인 오늘날 한국인에게 ‘거실’은 유럽인에게는 ‘응접실’이고, 우리 전통에서는 ‘사랑채’의 역할을 옮겨온 장소라고 보는 것이 가장 알맞을 듯하다. 즉, 손님 혹은 가족들이 함께 어우러져 휴식과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오늘날 한국인의 ‘큰 방’인 셈이다.
여러분이 사는 곳이 바로 그런 표준적인 아파트라면 내 집의 거실이 어디인지 금방 답이 나오겠지만(보통 현관과 연결되어 있는 중앙의 넓은 공간을 바로 ‘거실’이라 부른다), 빌라나 원룸, 다가구주택 등지에는 사실 ‘거실’을 어디로 할지 골라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과거의 주택은 한옥의 안방, 사랑방 개념으로 공간을 구획해놓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내가 짐을 풀어놓은 연남동의 다가구주택도 1.5평대의 작은 방, 7평 크기의 큰 방, 그리고 2평 남짓의 부엌 공간으로 이루어진 옛날식 집이었다. 이럴 때 반드시 ‘방의 크기’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진짜 유럽인들처럼 기능에 따라 내 마음대로 방을 분류하면 그만이다. 기왕에 우리는 파리지앵처럼 살기로 결심했으니 더더욱.
홀이라고 불린 혼합된 공간에 이것저것하며(심지어 용변 처리까지) 지내던 유럽인들은 14세기에 이르러서야, 집무실, 침실, 골방, 기도실, 서재, 응접실, 내실, 의상실, 욕실, 화장실 등등으로 공간을 나누어 살기 시작했다. 이때 방의 크기는 큰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한 방에서 하나의 기능만을 수행할 수 있으면 충분했기 때문이다. 실제 일반적인 파리지앵들이 사용하는 거실, 즉 ‘응접실’은 그리 크지 않다.
* 우리는 화려한 중세 유럽 귀족들의 공간에 익숙해져 있지만, 유럽의 서민들은 대부분 ‘방’이라는 개념 없이 한 공간에서 대가족이 모여 살며 먹고, 자고, 생리현상을 처리했고, 심지어 부부간 성행위도 가족들이 있는 공간에서 행했다.
아무리 그래도 1.5평이나 2평 공간에 응접실 기능을 부여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나는 7평 크기의 큰 방을 세 가지 공간으로 나누어 쓰는 방안을 구상했다. 집필실, 서재, 응접실의 기능을 큰 방에 모두 부여하고, 각각을 독립된 공간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게 바로 내 목표였다. 그것은 마치 마법을 부려야 가능할 것 같은 일이지만, 나는 그 어려운 일에 성공했다. (비록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공간을 통째로 넓게, 텅텅 비어 보이도록 두고 살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사고 싶은 물건은 많고, 둘 곳은 부족한 우리들에게 그런 사치의 기회는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럴 때는 공간을 명확하게 나누고, 기능을 분명히 부여할 수록 오히려 좁은 공간을 넓어보이게 만들 수 있다.
예를 들어, 보통 살림살이가 많은 경우 큰 방 안에 꾸역꾸역 우겨 넣어 대형마트처럼 없는 것이 없는 공간을 만들어 버리게 된다. 하지만 이 사실을 명심하자. 대형마트에서도 상품들은 품목에 따라 분명히 나누어져 진열된다는 것을! 만약에 대형마트에 시금치와 헤어드라이기와 속옷이 한 진열대에 나란히 진열되어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 의도를 해석하느라 물건을 사야 할 마음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벽이 없는 한 공간이라도 가상의 벽을 세우는 것을 통해 충분히 공간을 나눌 수 있다. 실제 파리지앵들이 가상의 벽으로 애용하는 물품들은 다음과 같다.
옷장, 책장, 책상, 소파, 서랍장 등등.
가상의 벽이라고 해서 반드시 천장까지 닿는 무엇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존재감이 분명한 가구나 물품이라면 오케이.
다시 말하면 땅따먹기를 할 때 금을 긋듯이 존재감이 있는 가구를 공간 위에 세워놓고 기준점을 삼는 것이다.
“소파 등 뒤부터는 집무실이야.”
“옷장 앞은 드레스룸이고 뒤는 응접실이야.”
“서랍장 앞은 침실이고 뒤는 공부방이야.”
하는 식으로 큰 가구를 이용해 심리적 선을 그으면 놀랍게도 실제로 벽을 세우지 않았지만 공간은 나누어진 것처럼 보이고, 여러가지 물건들이 한 공간에 담겨 있음에도 마치 서로 다른 곳에 있는 것처럼 안정적인 느낌을 자아내게 된다.
자, 가구의 등이 반드시 벽에 딱 붙어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우선 버리자. 그리고 내가 나눈 공간 구분점 위에 턱 놓아보자. 신대륙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다.
2018. 4. 20. 멀고느린구름.
* 이 칼럼은 라이프스타일 플랫폼 HAGO와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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