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서 그토록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이유, 내 아팠던 기억..
엄마가 짐을 싸서 나가고 내 등굣길에서 기다리던 그때 내 나이 중학교 1학년때이다. 엄마가 집을 나가고 아빠는 빠르게 서울에서의 생활을 정리했다. 대구로 내려갈 준비를 한 것이다. 아빠 혼자서 중학교 1학년, 초등학교 2학년 아이 둘을 볼 순 없었기에 할머니댁으로 들어가 살기로 한 것이다. 나의 지옥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명절마다 내려가서 뵙던 할머니와 함께 살기로 한 헐머니는 다른 사람이었다. 사실 명절에 뵙던 할머니도 그리 살갑게 반겨준다는 느낌은 없었던 것 같다. 어릴 때 기억들이긴 해도 우리를 반기는 아닌지는 어린아이라도 느낄 수 있다. 명절이 즐겁지 않았고 기차만 타도 멀미를 하는 나는 항상 녹초가 돼서 더욱 가기 싫었던 곳이었다. 엄마는 그럼에도 멀미로 오바이트를 하다가 실신하는 나를 업고, 더 어린 동생을 앞으로 안아 들곤 명절이면 남편이 있던 없던 매번 내려갔다. 사우디였는지 일본이었는지 아빠는 해외로 돈을 벌러 나간 적이 있는데 그렇다고 딱히 돈을 보내주거나 하진 않았던 것 같다. 아빠가 해외에 있을 적, 엄마는 남편이 없어도 힘들게 애 둘을 데리고 대구로 내려갔다. 그렇게 힘들게 내려가도 반겨주는 느낌은 없었다.
그때도 그랬는데 며느리는 집 나가고 아들이 자식 둘 데리고 오는 모습이 할머니에겐 더 밉게 보였을 것이다.
할머니집으로 들어가던 첫날 이삿짐이 도착하고 냉장고를 보더니 "없는 살림에 이런 큰 냉장고나 사고, 버는 돈 니 애미가 이런데 쓰고 다 먹어 없애고 있었나 보다" 뭐 이런 말을 하며 째려보던 눈빛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원래 쓰던 작은 냉장고는 오래 사용해 냉동실 손잡이에 전기가 흘렀고, 그 마저도 아빠가 술 먹고 와 냉동실 문을 부숴버렸었다. 그리고 새로 샀던 냉장고인데 그리 큰 것도 아니었고, 새것도 아니었다. 뭐가 그리 밉게 보였는지 어린 손녀에게 그런 말을 내뱉는 할머니였다.
할머니 집은 아주 옛날식 주택으로 대문으로 들어오자마자 오른쪽으론 말라비틀어진 나무문이 붙어있는 푸세식 화장실이 있었고 앞으론 마당이 있었다. 마당엔 수도 1개와 장독대를 모아두는 곳이 있었다. 왼쪽엔 세를 주는 방 2칸짜리와 주방이 있는 독채가 있었고, 그 옆으로 할머니가 지내는 주방과 안방이 있었다. 대문 정면, 할머니 안방 왼쪽으론 작은방 한 개와 주방이 있었는데 주방이라곤 하지만 그냥 간신히 씻을 수 있는 공간과 싱크대만 하나 옹색하게 붙어있는 형태였다. 세 주는 곳 빼곤 안방과 작은방 하나뿐인데 실내로 이어져있는 게 아니고 마당을 둘러싼 형태였다. 할머니 집을 둘러싸고 빌라 혹은 단독주책 2~3층 집들이 있었는데 그런 집들에 둘러싸여 이 집만 옛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주변집들에서 내려다보면 할머니집 마당이 다 보이는 형태였다.
작은 방은 장롱을 넣어두니 두 명 정도 간신히 누울 공간이었다. 그 방에서 동생과 아빠가 자기로 했고, 나는 안방에서 할머니와 함께 자야 했다.
그때까지 나는 베개 하나를 다리사이에 끼고 이불을 안고 자는 버릇이 있었다. 그때까진 그 잠버릇이 잘못된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이사 왔던 첫날이었는지, 얼마간 지나고 나서였는지는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새벽에 성경문구들을 읊조리며 마귀가 씐 나를 구제해 달라는 그런 기도문을 들었다. 실눈을 떠서 할머니를 보니 성경책을 펴놓고 두 손을 맞잡은 채 눈을 감고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계집년이 다리에 무언가를 끼고 잔다는 게 흉악한 일이라면서 제정신이 아니라서 그런다고 할머니는 말했다. 새벽에 그 소리에 깬 후 어린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그저 눈을 감고 자는 척하는 수밖에 없었다.
네 가족이 모여 산 기억이 많지도 않지만 대부분 아빠의 부재였지 엄마의 부재는 많지 않았다. 엄마의 부재만으로도 힘겨운 나이였던 그때, 할머니에게 나와 동생은 당신 자식 인생 마친 며느리의 자식들도 탐탁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 탐탁지 않는 것들 중 나는 아들도 아니고 딸이었다. 아빠를 빼다 박아놨어도 엄마의 딸이라는 게 더 컸나 보다. 동생은 아들이고 너무 어려서였을까. 유독 나에게 더 혹독했다.
여름에 따뜻한 물로 머리를 감으려고 물을 틀면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나자마자 작은방에 씻는 곳으로 뛰어와 보일러를 꺼버리고 찬물로 씻으라고 한다던지, 큰 고무대야에 물을 한 껏 받아 마당에 햇빛을 받게 해 따뜻하게 데워졌으니 그 물로 씻으라고 한다던지, (마당 수돗가는 화장실과 가까워 유독 쥐가 많았다)
겨울 주말에 목욕탕을 가려고 목욕바구니를 들고나가면 쫓아 나와 뭔 목욕탕을 일주일에 한 번씩이냐 가냐며 바구니를 뺏거나 했다.
남의 집 살이가 이리도 서러울까..
과일을 사 오면 교회에서 오시는 손님들 드려야 한다며 주방에 있는 광에 넣어두곤 자물쇠로 잠가버렸다. 그 외 간식거리들도 항상 광에 들어가 있었다. 남동생은 김치를 먹지 못하니 햄이나 고기는 동생을 줘야 하고 딸인 나는 고기반찬에 젓가락을 대면 혼나기 일쑤였다.
엄마와 살 땐 한 번도 생각지 못했던 차별들이 이어졌다. 그땐 1960년대도 아니고 1997년이었다. 이사했을 때가 방학이었던 기간이라 친구도 없었고, 할머니의 잔소리를 피해 가 있을 곳도 없었다. 그저 묵묵하게 듣고 있어야 했다. 엄마와 살 땐 잘해보지 않았던 설거지와 밥 하기, 밥 차리기 등의 일들이 넘어왔고 그마저도 잘해본 적이 없어 버벅대니 혼나기 일쑤였다. 니 애미는 그런 것도 가르치지 않고 뭐 했냐며 그 끝엔 항상 엄마 욕이 따라왔다. 새벽엔 몹쓸 마귀를 쫓아내 달라는 기도를 들으며 자야 했다. 이사 간 첫 달에 몸무게가 8킬로가 빠졌다.
개학 후 학교에서 친구들을 사귀며 할머니를 조금은 피해 있을 수 있었다. 하교 후 친구들 집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최대한 집에 늦게 가려고 했지만 할머니에게 통금은 시간이 아니라 해가 져가는 노을 지는 시간이 기준이었다. 항상 늦게 온다며 혼났고 어느 순간부터는 학교 가는 것 마저 보기 싫었는지 아빠 없을 때 계집애가 학교는 나와서 뭐 하냐며 내년부터는 공장에서 일하라고 하기 시작했다. 학교 그만 다니라는 할머니의 신경질 적인 말이 극에 달했던 어느 날 엄마에게 삐삐를 치고 공중전화로 전화를 받아서 울면서 제발 나 좀 데려가달라고 빌었다. 그때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갈가리 찢겨 나가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