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내복과 털양말 Sep 25. 2024

너의 첫

너랑 나는 눈 맞추고 한참 웃었어

  아들에게,


  오늘 너를 데리러 갔더니 선생님께서 그러시더라.

  "오늘 갑자기 시를 쓰겠다고 하더군요."

  "시를 쓴대요?"

  "네, 그러더니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고......' 하길래 시는 너의 생각을 쓰는 거라고 알려줬어요."

  선생님과 엄마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웃었지.


  태권도에 다녀와서 엄마가 유부초밥을 준비하는데 네가 또 시를 쓰겠다는 거야. 파랑 색연필을 들고 스케치북을 펼쳤지. 그리고는 한 글자 한 글자 소리 내어 말하며 쓰기 시작했지. 글씨는 크기도 제멋대로에 똑바로 써 내려간 것도 아니었지만 엄마 눈에는 무슨 현대미술 작품처럼 보였어. 엄마도 눈에 뭐가 씐 거지. 네가 하니까 다 이뻐 보이는 걸 보면. 이게 너의 첫 시야.


  <말>

  해가 반짝이는 이른 아침

  출근하는지

  빨리 왔는지

  먼저 일 시작한다


  "말이라는 게, 히히힝 따그닥따그닥 말이야 아니면 사람들이 대화하는 말이야?"

  "히히힝 따그닥 말이요. 말 타고 출근한 이야기예요."

  "그렇구나."

  "두 번째 시도 있어요."

  "오, 써 봐!"


  <이순신 장군>

  깜빡 잊고 있었네

  전투가 시작된 지


  너랑 나는 눈 맞추고 한참 웃었어. 그렇게 으하하 웃고 있는데 네가 말했지.

  "엄마, 난 어른이 되면 시인이 될 거예요. 퇴근하면서 감동적인 시만 골라서 엄마한테 보내줄 거예요."

  엄마는 감동해서 울컥했어. 진짜로 울뻔했잖아. 내가 살면서 이런 말을 듣는 순간이 오다니. 언젠가 씽씽이를 타고 어딘가 다녀오다가 아빠에게 혼이 난 네가 카시트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더니 "눈물 따라 내 마음도 뚝뚝 흐르네" 할 때 엄마는 요놈 참 재미있는 녀석일세, 하고 생각했었는데. 당연히 설레발이지만, 시인이 되겠다는 말이 왠지 터무니없게 느껴지지 않고. 엄마는 네가 내게 이런 감동의 순간을 준 것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거야. (그런데 이순신 장군님이 네 시 속의 장군님이었으면 우리나라 큰일 났겠다. 아니라서 천만다행이야! 으하하)



  내일은 네가 원하는 대로 늦게 데리러 갈게!

  아침에 만나자.


  사랑해,

  엄마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