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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Jun 11. 2021

말없이 당신에게다가서는 일

말없이 비가 내린다 어쩌면 떨어질지도 모른다. 위에서 아래로 가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고요하게 무엇이든 적실 듯 가라앉는다. 그런데 떨어진다는 말도, 내린다는 말도 그다지 낭만적이진 않다. 세상을 보고 느끼며 그것을 고스란히 글로 옮기는 행위란 그저 세상에 존재하는 표현 중에서 하나를 따분하게 소모하는 일에 그치고 말 테니, 차라리 비처럼 고요하게 당신에게 다가서는 편을 택하리라. 


차라리 스민다, 라는 동사로 슬쩍 위치를 바꿔보려나. 누가 보냈는지 모르지만 어디든 닿을 테고 다시 그 세계의 원천으로 흡수될 테니. 아무도 모르게, 서서히, 그리고 완전하게.


나는 때로 무엇이든 잊고 싶어 진다. 그런 식으로 사는 게 인생의 교훈이라며 또 그렇게 오래도록 훈육당하며 살아왔으니까. 그러니 그런 관습적인 흐름이라도 따르며 어제는 어제로 보내며 사는 거다. 밤하늘로, 성층권 보다 높은 곳으로, 별의 언덕 너머로 숨차게 솟아오르다, 그만 멈추어버린 10초 전의 수증기를 기리며, 나는 가슴에 품은 용기마저 잃고 산다. 그것도 큰 줄기의 흐름이니까. 


뜨겁게 그리고 무한하게 팽창하다 너무 멀리까지 내려가버린 지난날은 잊는 게 마땅하려나. 그러니까 힘이란 것은 엔트로피의 속성에 따르면 결국 생겼다, 소멸하는 속성을 가졌으니까. 지금 이 글처럼 잊히면 그만이다. 구름에게 의지하기엔 이미 힘을 모두 소비한 까닭이기도. 어쨌든 우리의 기억은 어딘가에 붙어있다, 다시 떨어져야 하는 운명에 놓이겠지.


내가 맞는 비를 과거의 당신 혹은 현재의 당신도 맞고 있겠지. 하늘을 잠깐 바라본다. 잿빛에 가려진 물방울 몇 개가 눈꺼풀에 잠시 맺힌다. 그러다 슬그머니 바닥으로 미끄러워 떨어지는데, 그 위로 다른 방울이 자리를 대신한다. 그래 나에게 당도한 10분 전의 빗방울이 다시 수증기로 살아올라 당신에게 배달될지도 모른다. 그게 당신과 나를 연결하는 유일한 수단일지도.


우리는 다른 곳에 있어도 같은 하늘을 보려 애쓴다. 당신이 하늘로 쏘아 올린 그것. 내가 만지고자 한 그것. 서로 같거나 혹은 다르거나, 또는 그 무엇도 아닌 것. 하늘을 보다 눈을 한 번 감으면 흐릿하게 번져가는 상념 하나가 잠시 나타날지도. 그걸 느끼려고 나는 우산도 쓰지 않고 거리를 마냥 걷고 싶은 걸지도.


번져가고 물들어가고 싶지만 우산은 포기할 수 없는 일, 3번 접힌 우산을 겨우 펴고, 후드득 부딪히는 소리를 단 몇 초간이라도 듣고 싶었으므로, 나는 우산의 너비에 숨어선 반걸음의 보폭으로 걷는다. 조금만 더, 그래 다음 신호등까지만 걷는 거야, 라는 주문을 외우며 무의식 속으로 갇혀 버린다. 후드득, 투둑, 자동차의 경적소리도 우산을 꺾는 바람의 우직함도 모두 가늘게 부서지는 음성으로 바뀐다.


나는 이해 못 할 충동에 빠져든다. 더 길게 발을 내디딜수록 더 멀어지는 자연의 명령들, 말하자면 스미는 소리, 젖어드는 소리, 증발하는 소리 같은 것들에. 저 멀리서 스며드는 온기 없음이 남긴 흔적들에.



얼마나 멀리 그리고 오랫동안 걸었을까. 강아지풀이 흔들리던 들판을 지나가고, 굽었다가 직선으로 뻗어가는 큰 도로를 지나가고, 듬직하게 생긴 자동차들이 지나가고, 큼지막한 우산을 든 사람들의 행렬을 뒤로 보내고, 다시 도시가 열리기 시작했으나 나는 어디에 있는 걸까.


여름 비가 가을비처럼 외롭게 쏟아지고 있었으므로 나는 잠시 처마 밑으로 숨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빛이 사라진 어느 카페 입구에 우산을 잠시 의탁해놓는다. 하염없이 생각에 잠긴 채 움직이지는 않지만 흔들릴 것처럼 생긴 차양 밑에 선다. 세상이 움직일 때마다 빗방울이 대각선으로 흔들린다. 우산을 포기했으니 나는 이른 여름 손님을 온몸으로 감당해내야 한다.


그 카페는 이유 없이 가을 옷을 꺼내 입고 있다. 여름이 앞으로 나설 듯했지만, 카페는 가을의 빛을 부상시켰다. 에바 캐시디의 Autumn Leaves가 막 시작했을 때, 난 이곳에서 커피를 마시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내 마음을 엿보기라도 한 것처럼, “따뜻한 커피 한잔하고 가세요. 사양하지 말고 안으로 들어오세요”라는 말이 귓속으로 그러니까 현실이 되어버린 건. 이건 그저 단순한 호객행위에 불과할까? 그래 빗 자락이 나에게 스몄구나. 비를 만나고 촉촉함에 스미고 나는 이렇게 따뜻한 소리에 또 스미고 빠져들고야 마는구나.


카페엔 한 사람도 없다. 나는 멋쩍게 카드를 꺼내곤 계산하려 든다. 나는 규칙을 지키려고 고요함을 깨우려 한다. “돈은 받지 않을게요. 오늘 같은, 별안간 가을처럼 변해버린 여름날에 돈을 받는 건 좀 그렇잖아요” 나는 젖은 안경을 고쳐 쓰고 그녀를 다시 바라본다. 눈을 맞추려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그녀, 어떤 말을 하려다 멈추고 마는 그녀, 난 말없이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이상한 날, 이상한 공간, 이상한 사람, 거꾸로 흐르는 시간. 여백만 가득한 저녁.


“한 동안 손님이 없었어요. 이곳은 곧 철거될 예정이래요. 어쩌면 당신은 이곳의 첫 번째 손님? 혹은 마지막 손님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이 세상의 첫 번째와 마지막을 장식하는 기분, 혹시 느껴보셨나요? 손님은 저의 유일한 손님으로 남게 될지도 몰라요” 그녀가 갑자기 뒤돌아서며 표정 없이 말했다.


접시 위, 얌전하게 올려진 쿠키 몇 개, 따뜻한 기운이 모락모락 오르는 머그 위로 온기가 나타나, 구겨진 몸을 잠시 편다. 한 모금을 입안에 굴리고 에바 캐시디의 그러니까 이미 오래전에 이 세상이 아닌 곳으로 여행을 떠나 버린 그녀의 낮은 음계 속으로 집중한다. 카페 사장 혹은 알바? 그 누구도 아닌 그녀는 일하느라 여전히 뒷모습이다. 손님도 한 명 없는 곳에서 누구를 마중하려고 이곳에 오래도록 서 있었을까. 나는 안쪽 세상에 박자를 맞추다, 가슴 한가운데가 달아오르는 걸 느낀다. 노곤한 저녁, 바쁘게 살아갈 이유도 없는 나른한 금요일 저녁. 빗방울은 차분하게 카페 건물에 스미고 있다.


나는 놀라서, 어쩌면 전혀 놀라지 않아서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첫 번째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어떤 슬픈 장면을 떠올렸다. 그리곤 그 장면을 내 남은 인생에서 얼마나 자주 재생하며 목격할 것인가, 저울질하며 다소 냉정하며 조금 따뜻해진 이곳을 오랫동안 사랑해야겠다고 가정한다. 나는 그녀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말이란 건 공중에서 무심하게 부서져 내릴 태니. 여기저기 어떤 곳으로든 산란해대는 바람의 장난처럼 우린 그저 흩어지면 그만일 인생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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