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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Aug 22. 2018

부족한 욕망을 채우고 허기를 해결하는

 잠이란 것은 인간이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각성할 때에만 유효하다. 어떤 확신도 없고 자각증상도 없는 원인 모를 잠을 중병이라 정의하겠다. 속절없이 의식이 시들어버리는 순간마다 찾아오는 막대한 무력감, 내 주변을 맴도는 회오리 같은 회전력, 요란스럽게 움직이던 모든 체계가 결국 상실 앞에서 위용을 잃고 마는, 나는 더 깊은 역동적인 무의식의 세계로 침잠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영혼의 지령이다. 악마의 속삭임 혹은 천사의 갈망일지도 모른다. 삶을 달콤한 것으로 만드는 재료가 된다는 수면 이론이, 내일의 삶을 기대하도록 의지와 각오를 가끔 고양시키기도 하지만, 한동안 시간이 무방비 상태로 전락한다는 사실이 절망을 안기기도 한다. 시간은 과연 정숙하게 한 방향으로 흐르기나 할까. 이토록 휘어지고 새어나가는, 과거로 역행 가는 짓거리를 서슴지 않는데.


 새벽마다 갑자기 잠에서 깨어나는 건 아직 구원받을 준비가 덜 되었다는 걸 의미하는 걸까. 무의 세계는 혼돈이고, 그러한 무위(無爲)가 엄연히 존재한다라는 걸 내 잠재의식에 주입시키기 위한 악마의 공작 또는 간계인 것인가. 


 새벽 2시는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전혀 다른 차원의 시공간이다. 살아있는 것도 아닌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닌, 이야기를 부여받지 못한 단편 소설들이 급조되어 마지막 빛을 발하는. 


 나는 무엇이든 잊어야 한다. 그래서 산다. 일상에서 떠돌다 사라지는 무기력한 자유이든,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울부짖던 통곡의 시간이든, 자본가의 폭력적인 언행 앞에서 감래 하던 순간이든, 몇 글자라도 더 적어보겠다고 심야시간까지 기다리던 사유의 몸짓이든. 


 한 때는 잠과 맞서 싸워보겠다는 전의를 불태운 시절도 있었지만, 세월의 흔적이 숨결에 자신만의 무늬를 각인시킬 때마다 나는 속절없이 숨을 몰아 쉬거나 잃었던 의식을 겨우 찾거나, 그러한 광경을 묵도하거나, 결국은 멍하니 시선을 떨어뜨릴 수밖에, 남은 생을 향한 별다른 도전 과제를 일으킬 수 없었다.


 물론 내가 그 싸움에서 완벽한 패배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가끔은 승리감의 절정에 도달해서 감정이 너울 거리기도, 신경계가 무감각과 예민을 놓고 저울질을 하기도 했으니, 그러한 순간 격앙된 감정은 마치 그리스의 전령 페이리피데스가 몇 백 킬로미터를 단숨에 주파하는 수준에 근접했던 것이다. 


 그러한 순간, 나는 잠에 드는 것을 거부한다. 고조된 특이점(singularity)을 품에 안은 채 다시 에너지를 증폭시키고, 조금 잦아들게 방치했다가 급속히 예열시키고 소모하는 것을 반복하여 최종적으로는 세상의 영향권으로부터 완벽히 해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잠이란 진정한 예술적 구원의 목적지는 아닐까, 라는 혼란이 찾아온다. 내가 찾고 싶었던, 조르바에게 오랫동안 질문했으나 얻지 못했던 자유의 참 뜻, 자유를 향한 올바른 길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것이다. 나는 잠으로 부족한 욕망을 채우고 잠으로 허기를 해결한다. 가끔 한 번씩 세상을 환기하는 방법으로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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