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시 문정희 시인의 꿈
꿈
문정희
내 친구 연이는 꿈 많던 계집애
그녀는 시집갈 때 이불보따리 속에
김찬삼의 세계여행기 한 질 넣고 갔었다.
남편은 실업자 문학 청년
그래서 쌀독은 늘 허공으로 가득했다.
밤에만 나가는 재주 좋은 시동생이
가끔 쌀을 들고 와 먹고 지냈다.
연이는 밤마다
세계일주 떠났다.
아테네 항구에서 바다가재를 먹고
그 다음엔 로마의 카타꼼베로!
검은 신부가 흔드는
촛불을 따라 들어가서
천년 전에 묻힌 뼈를 보고
으스스 떨었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또 떠나리.
아! 피사, 아시시, 니스, 깔레……
구석구석 돌아다니느라
그녀는 혀가 꼬부라지고
발이 부르텄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그만
뉴욕의 할렘 부근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밤에만 눈을 뜨는
재주끈 시동생이
김찬삼의 세계여행기를 몽땅 들고 나가
라면 한 상자와 바꿔온 날이었다.
그녀는 비로소 울었다.
결혼반지를 팔던 날도 울지 않던
내 친구 연이는
그날 뉴욕의 할렘 부근에 쓰러져서 꺽꺽 울었다.
필사 모음
꿈(자작시)
공심
나는 그녀에게 시 한 편을 남겼다
어디쯤 머물러 있냐는
보내도 돌아올 곳 없는 차가운 바람 같은 말을 담아
그녀가 보낸 시를 읽고
눈물로 찍은 그녀의 마침표, 마지막 하나를 찾아야 했다
찾으면 찾을수록 그녀가 남긴 흔적은
희미한 선자국이 전부였다
그녀는 여행 가방을 꾸리다 포기한 사람처럼
잿빛 표정으로 미소를 짓거나
대답을 잃은 사람처럼 은하수에 발자국을 남겼다
우린 마치 잡힐 수도 닿을 수도 없는 우주 끝에서
말하자면, 세상에서 가장 서글픈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다 서로의 세상을 품었다
시간의 끈에 붙들렸으나 근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어리석은 시인처럼 우린 별 빛 속으로 그림자를 감췄다
밤은 파도처럼 무서운 기세로 불어왔다
부서지고 밀려드는 기세에 눌려
나는 한 방울의 물거품도 만질 수 없었다
다만 시 한 편은 살아 있었다
꿈은 멀리 있다. 바라만 보아도 잡히지 않아도 꿈의 존재는 우리를 살게 한다. 살다 보면 잃어간다. 그것이 순리라고, 잊히는 것이 우주의 섭리라며 우리는 깨우친 사람처럼 살아간다. 어느새 우린 희망에 득도한 사람이 됐다.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느끼던 시절은 달아나고 말았다. 꿈은 실리가 되고 물질의 소유로 변질한다. 꿈이 아닌 것들을 꿈이라 가장하기도 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힘을 잃는다. 집착도 설 자리가 사라진다. 내 손에 쥐어진 것은 꿈인가 그저 부서지는 가루에 불과할까. 꿈은 균형을 찾을 수 있을까. 균형을 회복하려고 글을 쓰는 게 아닐까? 시는 균형을 지탱하는 마지막 보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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