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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앗의 정원 Jul 02. 2022

시골에 집은 못 지어도 농사는 지을 수 있지

주말을 맞아 부모님 댁에 들렀다. 오랜만에 들른 집에서 맛있는 것도 먹고 엄마 아빠랑 그동안 못 나눈 얘기도 실컷 해야겠다 마음먹었었는데.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욱신욱신 아파온다. 아무래도 낮에 밭에서 너무 무리했나 보다. 반가워하는 엄마 아빠에게 간신히 인사만 하고 기다시피 방에 들어가 누웠다. 이불을 덮고 침대에 누웠더니 몸이 스르르 녹아 땅 속으로 스며드는 느낌이다. 잠결에, 거실에서 남편과 엄마가 이야기 나누는 소리가 들려온다.


"미정이는 어디 아픈가 보네!"

"오늘 텃밭에서 돌 고르고 왔거든요. 힘들었는지 몸살이 왔나 봐요."

"아이고, 애들 데리고 무슨 텃밭이야, 힘들게. 밭이 얼마나 크길래?"

"3평이요. 하하!"

"3평? 30평도 아니고 300평도 아니고, 3평 텃밭 돌 고르고 몸살이 났어?"


그렇다. 고작 세 평짜리 주말텃밭 한 구좌의 돌을 고르고 나는 호되게 몸살을 앓았다. 주말텃밭과 우리 가족의 뜨거운 첫 만남이었다. 


내가 사는 경기도 광주는 수도권의 대표적인 도농복합도시이다. 중심지는 아파트와 건물들로 들어차 있지만 조금만 외곽으로 나가도 푸른 논과 밭이 펼쳐진다. 집에서 차로 15분가량을 달리면 토마토로 유명한 마을 퇴촌이 나온다. 이곳에서는 토마토 수확철인 5-6월이 되면 농민들이 갓 수확한 토마토를 직접 판매한다. 길가에 주욱 늘어선 판매장에는 토마토뿐 아니라 감자, 양파, 대파, 고구마 등 이제 막 수확을 마친 다양한 채소들이 진열되어 있다. 토마토는 보통 초록색일 때 수확하여 유통과정 중에 빨갛게 익게 되는데, 이곳은 토마토가 빨갛게 익을 때까지 기다렸다 수확하니 토마토의 진한 풍미를 느낄 수 있다. 직접 농사지은 농민에게 농산물을 사는 경험이 재미있기도 하고 주변 풍경이 아름답기도 해 드라이브도 할 겸 가족들과 종종 퇴촌을 찾는다. 


퇴촌을 들를 때마다 ‘이 곳에 마당 딸린 집 하나 있으면 어떨까? 아이가 어릴 때 마당 있는 집에 살면 좋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남편의 출퇴근과 아이의 유치원, 학교, 각종 편의시설 및 집값에 대한 생각 때문에 선뜻 마당 딸린 집으로의 이사는 도전하지 못했다. '마당 딸린 집에 살고 싶다'라고 노래를 부르면서도 이를 실행하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는 나를 보며, '도심지에서의 편리함을 포기하고 주택에 사는 고달픔을 모두 감내할 만큼 시골 살이를 원하는 것은 아니구나' 하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이후로도 이 곳을 지날 때마다 나의 마음은 어김없이 살랑살랑 일렁인다. 그러던 차에 퇴촌에서 시민들을 위한 주말텃밭을 분양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망설임 없이 텃밭 한 구좌를 분양받았다. 내가 여기서 집을 짓고 살지는 못해도, 일주일에 한 번 들러 농사는 지을 수 있지! 그렇게 우리의 텃밭 생활이 시작되었다. 


처음 텃밭에 갔던 날은 2015년 4월 초였다. 햇살은 따사로워지고 있었지만 텃밭은 아직 겨울의 티를 벗어내지 못해 다소 삭막한 분위기였다. 우리 말고도 여러 가족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삭막한 텃밭을 둘러보고 있었다. 갈색 흙더미만 덩그러니 놓인 곳이었는데, 그들의 눈에는 파릇파릇하게 자라나는 작물들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텃밭 주인이 우리에게 배정된 텃밭으로 안내해 주었다. 적절한 크기로 구역이 나눠진 밭 한 칸이 앞으로 1년간 우리 가족이 일굴 텃밭이었다. 1년간은 이 땅이 우리 것이구나. 땅이 생기니 든든했다. 


텃밭에 앉아 맨 손으로 흙을 뒤적거려보았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듯 부드럽고 촉촉한 흙의 감촉이 손끝에 와 닿는다. 흙에 대해 잘 모르는 초보가 보기에도 영양분이 풍부한 건강한 흙이다. 평소 모래놀이로 기초를 다진 다섯 살 아이는 익숙한 듯 흙 놀이를 시작했고 나도 그 옆에 앉아 흙을 만지작댔다. 


도시에서 자라난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나 역시 농사를 지어본 경험이 전무했다. 맨 손에 닿은 흙의 느낌이 생소했다. 예전에 맨 손으로 흙을 만져본 적이 있었던가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역시나 떠오르는 순간이 없었다. 처음 하는 경험임에 틀림없었다. 학교 운동장이나 바닷가의 까슬까슬한 모래 말고, 텃밭의 촉촉하고 부드러운 흙은 처음 느껴본 것이다. 흙의 자극은 예상외로 강렬했다. 흙을 만지고 있자니 머릿속에 복잡한 생각이 없어지고 흙의 감촉만이 또렷하게 느껴진다.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살로 머리카락이 따끈하게 데워졌다. 향긋한 흙 내음이 섞인 맑고 시원한 공기가 폐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다. 조용한 공간에 간간이 까마귀 울음소리만이 들려왔다. 자연 속에 온전히 혼자만 있는 듯했다. 불멍, 물멍 다 좋았는데, 그 중에 으뜸은 단연 흙멍이었다. 자연의 땅과 나의 맨 살이 맞닿는 경험을 통해 나는 비로소 내가 이 지구에 살고 있는 아주 작은 보통의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자니 텃밭 주인이 쇠스랑을 들고 오셨다. 


"밭에 커다란 돌이 있으면 골라내고, 준비해 온 모종들 심으세요! 상추와 당근 씨앗은 조금 나눠드릴게요."


아, 그렇지. 밭일을 시작해야지. 당시 농사경험이 전무했던 나는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몰랐다. 주인이 돌을 고르라고 하니 밭에 주저앉아 일일이 땅을 뒤적이며 돌을 골라냈다. '커다란 돌'이 얼마나 큰 것을 의미하는지 몰라 돌이란 돌은 다 골라냈다. 손바닥만한 밭의 돌을 고르는데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쇠스랑을 쓸 줄 몰라 이곳저곳 푹푹 찍어대느라 밭이 패이고 어깨가 아팠다. 그렇게 땅과 씨름을 해댔으니 몸이 당해낼 재간이 있나. 몸살이 난 것이다. 


하루를 꼬박 앓고 있으려니 앞으로 밭에 갈 일이 막막했다. 할 줄도 모르면서 괜히 시작했나 싶었지만, 이왕 시작한 것 1년만 해보자 마음먹었다. 호되게 당한 뒤라 다시는 밭일이 하기 싫을 줄 알았는데 그때부터 8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는 주말마다 텃밭에 들러 작물을 돌본다. 그 사이 다섯 살 꼬마는 열두 살 사춘기 소녀로 자라났고, 텃밭에서 걸음마를 배운 둘째도 일곱 살 형아가 되었다. 보드라운 흙, 따스한 햇살, 시원한 공기, 파란 하늘, 탁 트인 풍경으로 다가온 주말텃밭이 강렬하게 몸속에 각인되었는지, 멈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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