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처음 본 날

아침 / 2-1

by 지안

창문을 여는 순간,

제주의 아침 공기가 조용히,

그러나 선명하게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오늘따라 유독 차가운 기운이

이불속에 남은 온기를 밀어내듯 스치고 지나갔다.

조금은 투명하고, 어딘가 단단한 느낌이 드는 공기였다.

겨우내 눌려 있던 감정들이,

살며시 몸을 비틀며 일어나는 기척처럼 느껴졌다.

말로 하기 어려운 감정이,

공기의 틈 어딘가에서 조용히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커피를 내렸다.

몇 달째 쓰고 있는 모카포트에서

익숙한 김이 조용히 피어올랐다.

매일 반복되는 아침,

변한 건 없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잊었다고 생각했던 감정 하나가

다시 나를 조용히 흔드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틈 사이로,

오래된 장면 하나가 조용히 떠올랐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떠올린 게 아니라

그 기억이 나를 불쑥 찾아온 것에 가까웠다.



그날도 이와 비슷한 공기가 있었다.

서울의 초겨울.

대학교 수업을 마치고 근처 카페에 잠깐 머물렀다가 나오는 길.

어둑한 저녁 무렵,

가게 조명과 가로등 불빛이 골목 벽을 따라 묻혀 있었다.

나는 천천히 코트를 여미며 걸었다.

별일 없는 하루였고, 별 감정도 없는 저녁이었다.


그때,

무심히 뒤를 돌아본 내 시야에

그녀가 들어왔다.


같은 수업을 듣는 얼굴,

이름도 모르는 사람,

말 한마디 나눠본 적 없는,

그녀는 내가 있던 카페에서 조금 늦게 나오는 중이었다.

굵은 웨이브가 드리운 긴 머리,

브라운 빛 긴 코트로 몸을 감싸며 헤드셋을 꺼내 귀에 꽂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마치 주변 풍경을 흘긋 훑듯,

스치듯 내 쪽을 바라봤다.

아주 짧은, 거의 스침에 가까운 눈 맞춤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짧은 순간이 마음 어딘가에 박혀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다시 돌려 반대 방향으로 걸었지만,

두어 걸음 뒤에 또 한 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그 무심한 듯 정확한 시선.

그리고 또 한 번.

마치, 그 순간이

그녀에게도 조금은 이상한 장면인 것처럼.


나는 움직이지 못한 채,

그녀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말도, 인사도, 그 어떤 접촉도 없이.

우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이 내겐 어떤 문장보다 더 선명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 순간

나는 분명히 어떤 감정에 휘말렸었다.

하지만 그게 사랑이라는 걸

그 순간, 당시의 나는 알지 못했다.


그건 단지

한 사람을 처음 본 순간에 일어난

너무 빠르고, 너무 조용한 진동이었을 뿐이었다.



나는 지금 제주에 있다.

그날로부터 몇 해가 지났고,

그녀를 다시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문득 열어둔 창으로 스며든 이 공기가

그날의 그것과 너무 닮아 있었다.

마치, 그 기억이 나를 다시 찾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를 처음 본 날

그건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사랑의 첫날이었다.


사랑이라는 이름도 붙이지 못한 감정이

그날, 아주 조용히 내 마음에서 자라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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