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블라시온 데 캄포스

D+14

by 지안

오늘은 또 다시 30KM 여정이어서 5시에 일어나 6시 10쯤 출발했다. 하늘을 보니 조금의 빛도 없는 완전한 밤이었다. 이렇게나 어두운 적은 처음이었다. 발의 피로도와 통증 때문에 평지에서도 스틱 없이 걷는 건 힘든 일이었지만, 탁탁 거리는 소음 때문에 되도록 마을을 벗어나는 동안은 사용하지 않았다.

마을 한편에 뜨문뜨문 서있는 가로등을 지나 완전한 암흑 속으로 서서히 걸어 들어갔다. 주변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런 길을 조금이나마 밝혀줄 달은 구름에 은근히 가려져 역할을 해주지 못했다. 대신 어두운 밤 길잡이가 되어주는 북극성처럼 나보다 500M 정도 앞서가는 사람이 그 속에서 환한 랜턴을 켜고 걸어가고 있었다. 그보다 훨씬 앞에 있는 몇몇 사람의 희미한 불빛도 앞으로 내가 나아갈 방향을 알려주고 있었다. 나도 미리 꺼내 둔 랜턴을 켜서 걷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뒤를 돌아보니 마을은 금세 사라져 있었다.

그렇게 10여분을 걷다가 물을 마시려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니 달이 제 모습을 환히 드러냈다. 순간 달빛에만 의지해서 이 순간을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에 휩싸였다. 나는 손에 든 랜턴을 끄고 조심스레 걸었다. 생각보다 빠르게 어둠이 익숙해졌다.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은 물론이고, 그 속에 숨겨져 있던 풍경이 너무나 환하게 눈에 들어왔다.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의 개수를 샐 수 있을 정도였다. 또 길가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달팽이도 보였다. 나는 너무 놀랐다. 달의 밝기가 이렇게나 환하구나 하고 헛웃음이 나왔다. 예전에 전기가 없을 때 밤에 어떻게 생활을 했을까 생각했던 내가 민망해질 정도였다. 자연의 이치에 어긋나는 일도 아니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무척 신비하고 오묘했다. 완전히 안 보일 거라 생각하던 게 보일 정도이니 조금 과장을 해서 눈이 먼 사람이 갑자기 눈이 트이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만큼 나에게 너무나 놀라운 경험이었다.

나는 그곳에 잠시 멍하니 섰다. 바람에 살랑이는 풀잎들 소리, 귀뚜라미 소리가 선명했다. 공기의 흐름도 세포 하나하나에 스미는 듯 선명했고, 구름이 잔잔하게 흘러가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내 주위에서 나를 감싸는 모든 것이 나 자체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문득 너무나 갑작스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동안 뭘 위해 그토록 심각하고, 치열하게 살려 했을까. 심지어 그런 것들을 내려놓기 위해 온 이곳에서 조차 치열하게 걷고 만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아차 싶었다. 또 무엇을 그토록 두려워했던 것일까. 그것이 실체가 있기는 한 것인가. 지난날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갔다. 헛웃음이 짧게 새어 나왔다. 그리고 큰 한숨을 한번 훅 쉬었다. 그동안 버거웠던 많은 순간들에서 지금처럼 잠깐 그 자리에 멈춰 섰더라면 이토록 소중한 것들을 바라볼 수 있었을 텐데 하고 속으로 혼잣말을 했다.


그렇게 한 시간을 달빛 속에서 걸었다. 참 묘하고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달에만 의지해서 이렇게 걸었던 적이 있었을까. 고등학교 때 학교 뒷산을 오른 기억이 어렴풋이 들긴 한다. 아무튼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고, 이 순간이 기억에 유독 남았다.

역시나 이날의 일출도 아름다웠다. 여명과 일출이 연이은 한 시간 정도 아주 멋진 길을 걸었다. 감사했다. 그 후의 길은 꽤 오랫동안 완전 평지, 연이은 허허벌판이었다. 해가 50도 정도 기울었을 때 3KM 정도를 날파리 무리가 나에게 빌붙어 같이 걸었다. 아주 짜증이 났다. 그놈의 날벌레. 파리. 정말 짜증났다. 그리고 발이 또 다시 본격적으로 아파왔고, 체력적으로도 힘들었다. 완전한 평야 위를 걷는 일은 지독했다. 지루했다. 특히나 오늘 날씨는 유독 더웠기 때문에 힘겨웠다.

정말 힘겹게 프로미스타에 도착해서 장을 봤다.(아, 그 전에 길에서 10유로를 주웠다. 정말 감사했다.) 그리고 근처 턱이 있는 곳에 앉아 콜라와 빵을 먹었다. 그렇게 달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시 3KM를 걸어서 운하로 보이는 물길을 지나 6시간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숙소는 거의 호텔급이었다. 야외에 널따란 과수 농원이 있었고, 숙소동과 레스토랑 건물이 분리 되어있었다. 10유로로 상대적으로 비싼 가격이긴 했지만. 그간의 숙소를 생각하면 정말 좋았다. 숙소는 2층 구조도 된 1인용 벙커 침대였다. 나는 얼른 씻고, 오랜만에 빨래를 세탁기로 돌리고, 침낭과 신발도 뜨거운 햇살에 널어놓았다. 그리고 1인 침대에 누워 새소리와 바로 옆 창 밖을 힐끔거리며 일기를 썼다. 다시 말하지만 정말 좋은 숙소였다. 이제 이런 숙소가 앞으로 있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눈가 옆이 갈라지는 증상이 생겼다. 손도 많이 건조해지고, 갈라졌다. 내 건강이 점점 악화되어갔다. 난 지금 꾸준히 걷고 있지만, 아직도 왜 걷는지 명확히 말 할 수 없었다. 정말이지 인생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좋은 경험이라는 누군가의 말만 듣고, 알 수 없는 기대감만 품고 왔을 뿐이다. 정말 좋은 경험이었다길래. 부디 나에게도 그런 경험이 되길 바랄 뿐이었다.


저녁은 그저 그랬다. 처음에 기본으로 제공되는 샐러드, 빵과 와인이 있었고, 맑은 국 같은 게 나왔는데 도무지 알 수 없는 맛이었다. 메인으로 달걀과 미트볼이 나왔다. 무척 짰다. 하지만 장소와 분위기는 아주 멋졌다.

밤이 되니 조금 쌀쌀했지만, 안락했다. 침대에 누워 엄마에게 그간 못 보냈던 사진을 보내고 싶었는데 인터넷이 터지지 않아 그러지 못했다. 아이유의 밤편지를 누워서 여유 있게 감상하니 문득 집이 그립고, 가족이 그립고, 한국이 그립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 나오면 개고생.. 이라는 생각이 짧게 들었지만, 섣불리 그런 생각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늘도 스스로에게 수고했다는 인사로 하루를 마무리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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