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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현달 Oct 11. 2024

사신과 세이렌의 이야기 (19화)


사신이 말하는 깊은 산속의 별장


소희 씨는 나와 여행을 가고 싶다고 했다. 굳이 차를 타고 가자고 한다. 난 어릴 때 겪었던 사고 이후로 차를 탈 수 없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차 타는 것쯤은 가뿐히 무시할 수 있었다. 난 그게 가능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피할 수 없었다. 난 그녀가 원하는 걸 해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어차피 죽을 거라면 그전에 뭘 하든 상관이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의 여행날 아침 소희 씨는 나를 이끌고 병원을 찾았다. 알고 있었다. 병원에 가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가지 않았었다. 왜냐하면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스스로 필요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도 동의할 수밖에 없다.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약을 처방받았다. 절대 할 수 없을 거 같던 일들이 연이어 일어난다. 난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무언가 하고 있었다. 혼자라면 절대 불가능했겠지. 함께해서 가능한 일이겠지. 병원에 오는 건 생각보다 간단했고, 그냥 일상처럼 진료를 받았다. 이제 나는 변할 수 있을까?


난 절대 나 자신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으니까. 그런 나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난 그녀 말 한마디에 어느새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여행을 가기 위해 차에 타자마자 나는 불안함이 엄습해 왔다. 소희 씨가 내 손을 잡아주며 나를 위로해 주었다. 난 안다. 나는 이런 기본적인 것도 못하는 바보라는 걸. 소희 씨는 이유를 묻지도 않았고, 나를 비난하지도 않았다. 그냥 내 옆에서 조용히 나를 믿어주고 지지해 주는 걸 느낀다. 그러한 조건 없는 믿음이 주는 힘일까? 난 소희 씨 목소리를 들으며 이내 잠이 들 것 같다. 차가 달리는 내내 나는 잠결에 점차 마음이 차분해지는 걸 느꼈다. 막상 시작되자 세상의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냥 시간에 내 몸을 맡겼다. 조용히 전해지는 차의 진동과 창문에 전해지는 바람소리에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어갔다. 잠들기 직전에 나는 다짐했다. 아직 간이 있을 때 리의 여행을 작해야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희 씨와 함께해야겠다.


잠든 나를 그녀가 깨워준다. 약속대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깨워주었다. 우리는 별장에 도착하기 전에 잠시 마트에 들르기로 했다. 눈을 뜨면서 생각했다. 오늘아침 그와 함께다. 내일도 가능할까? 이런 생각이 들수록 지금 이 시간이 너무 소중했다. 어쩌면 시간은 상대적일 것이다. 그녀와 함께하는 하루가 마치 영원한 것처럼 느껴졌다. 오늘 하루를 기억하면 그 하루에 영원히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나와 그녀에게 딱 일주일만 주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나면 난 그 일주일에 영원히 살 것이다. 유한한 시간으로 한정된 우리의 사랑은 지금 진행되고 있다. 난 사랑이라고 느꼈다. 나는 마트에서 카트를 밀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 틈에서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은 너무나 짜릿했다. 두리번거리며 그녀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사랑해요. 그냥 소리 내서 말해보고 싶었어요. 입밖에 내보지 않으면 믿어지지가 않을 것 같아서요.” 이것저것 물건의 가격표를 비교하던 소희 씨는 나를 힐끗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알아요.”


소희 씨를 만나고 알게 되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그중에서 한 가지는 이것이다. 나는 마트가 참 좋다. 아니 마트가 좋다기보다 소희 씨와 함께 오는 마트가 참 좋다. 마치 우리의 일상이 모두 이어진 것 같았다. 나만 생각하면 되던 시절이 아니었다. 샴푸를 하나 사더라도 그녀와 상의했다. 왜 이 샴푸가 좋은지 설명해 주는 그녀를 한참 바라보곤 한다. 이유가 필요할까? 그녀가 좋다는데. 이유는 필요 없었다. 그래도 그 사실을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이것저것 설득하려는 모습이 너무 귀여우니까.


하지만 별장에 도착하자 소희 씨는 겁에 질린듯한 모습이다. 계속 괜찮은 척 웃어 보이지만 난 느낄 수 있었다. 소희 씨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여기 별장에서 엄마가 사고를 당했다고 해요. 그런데 난 분명 기억해요. 이 별장은 엄마 죽음과 관련이 없어요. 그래도 혹시 몰라서 와보고 싶었어요. 만약 아버지말이 사실이라면 이곳에 왔을 때 무엇인가 떠오르는 게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나는 울 것처럼 말하는 소희 씨의 손을 잡아주었다. 오늘 차에 탔을 때 나를 위로해 주던 그녀의 손을 이번에는 내가 잡아주었다. 우리는 번갈아가며 서로를 위로해주고 있다. 난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이 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손을 잡고 산책도 하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이야기도 나누었다. 이번에는 본인이 요리를 해주겠다며 아까부터 주방에서 부산을 떠는 소희 씨를 바라본다. 난 알고 있다. 그 음식은 맛있을 예정이다. 그래야만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산속에 위치한 별장은 마치 그녀와 나심연 같았다. 높은 봉우리에 가려져 햇빛이 직접 닫지 않는 심연. 몇 겁의 산을 넘어서며 나는 익숙하게 나의 심연으로 소희 씨를 초대했다. 혼자였다면 두려웠을 것이다. 잔인하게 외로운 내 안의 어둠이었다. 그 어둠을 뚫고 소희 씨가 나에게 다가온다. 나는 잔뜩 차려진 식탁을 바라보았다. 한껏 힘을 준 플레이팅에 그녀의 진심이 느껴졌다. 그거면 된 거 아닌가? 요리에서 맛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나를 위해서 준비해 준 것이니까. 식사를 마치고 다시 우리 사는 세상에 빠져들었다. 그냥 그렇게 시간은 우리를 위해서 잠시 쉬어갔다.


[ 20화로 이어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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