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렌이 기억하는 여행
아침 햇살에 눈을 뜬다. 보통의 날들에는 항상 커튼을 치고 잠에 들었다. 하지만 어제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그런 우연한 일들이 이런 아침을 맞게 했다. 강박적으로 해오던 일들을 잠시 놓아줄 필요가 있다. 때로는 그렇게 실수하게 둘 필요가 있다. 활짝 열린 커튼으로 미친듯한 햇살이 든다. 침대 발밑쯤 와닿은 햇살은 시간이 지날수록 몸을 타고 오른다. 햇살이 내 몸을 타고 오를수록 나도 그 흔적의 감각을 느낀다. 따스함은 바스락거리는 새하얀 이불에서도 전해진다. 평소와는 다르게 오늘은 침대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기가 싫어 잠시 게으름을 부린다. 아직 잠들어있는 그를 바라보다 말했다.
“오늘 퇴근하고 꼭 하고 싶은 게 있어요.”
비몽사몽 한 목소리로 그는 나에게 말했다.
“출근을 꼭 해야 하나요?”
지훈 씨는 마치 내가 내일이라도 죽을 사람처럼 나를 애지중지 아끼는 게 느껴졌다. 이렇게 사랑받을 수 있다면 내일 죽어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바보 같은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정말 내가 죽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자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그렇게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생각을 가지게 된 걸까? 그런 생각에 다다르자 나는 그가 너무 안쓰러워졌다. 그냥 사실대로 말할까? 난 이미 어렸을 때 그의 목소리를 듣고도 아직 살아있다고? 하지만 말할 수 없다. 그가 스스로 믿고 싶은 걸 믿는 거뿐이니까. 어쩌면 그렇게 믿어야 그는 살 수 있는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내가 며칠만 더 이렇게 사랑받고 싶으니까. 그가 진실을 알게 되면, 어쩌면 그는 다른 사람이 되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잠시 뿐이란 걸 알고 있다. 난 그가 스스로 자신의 감옥에서 나올 수 있게 함께 해줄 것이다.
“오늘은 출근해야 해요. 안 그래도 며칠 병원을 봐줄 후배를 찾았어요. 오늘은 몇 가지 인수인계를 해줘야 해요. 그러고 나면 하루종일 마음껏 놀아요.” 그는 불안한 듯 말했다.
“오늘이 아니면 안 돼요. 내일까지 기다릴 수 없어요. 그러면 나도 같이 출근할게요. 잠시도 떨어지기 싫어요.”
나는 그의 품에 파고들며 말했다.
“좋아요. 대신 내가 원하는 걸 들어줘야 해요. 만약 내가 죽는다면 살아있을 때의 내 모습을 그려주세요. 세상에서 두 번째로 행복한 모습으로요. 그림을 다 그리기 전에 지훈 씨는 죽으면 안 돼요.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면 행복해 보일 때까지 그려야 해요.”
지훈 씨는 매우 곤란한 표정으로 머뭇거렸다. 나는 다시 말했다.
“내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해주기로 했잖아요. 거짓말이었나요?”
“그러면 나에게 행복한 모습을 계속 보여줘야 해요. 행복이란 건 너무 어려워요.”
“어렵지 않아요. 난 지금도 행복하니까. 그러니까 오늘의 나보다 더 좋아 보인다면 그건 행복한 거예요.”
출근 준비를 한다. 문밖에서 다애소리가 들린다. 문을 열자마자 밤새도록 외로웠는지 나에게 달려와 안긴다. 미안. 이제 이방은 네가 막 들어올 수는 없어. 다애 소리에 지훈 씨가 일어난다. 우리는 준비후 함께 집을 나섰다.
병원에 도착하자 미리 부탁했던 후배가 와있었다. 후배는 지훈 씨를 요리조리 보더니 나를 부르며 부산을 떤다.
“선배 여자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요? 남자 좋아했던 거예요?”
“남자인지 여자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야. 지훈 씨인 게 중요한 거지. 그렇게 되더라고.”
“선배는 외모가 안 중요하다고 했었잖아요. 선배 아무리 봐도 얼굴 엄청 따지는 거 같은데. 아니 평소에 말한 거랑 너무 다른 거 아니에요?”
“그건 나도 할 말이 없다. 아니라고 못하겠네.”
지훈 씨는 처음 나와 밤산책을 나선 이후로 더 이상 마스크를 쓰고 다니지 않는다. 솔직히 그게 너무 마음에 안 든다. 어디를 가든 지훈 씨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다. 평소에 나에게 쏟아지던 많은 여성들의 시선이 더 이상 나를 향하지 않는다는 걸 느낀다. 다시 마스크를 쓰라고 해야 할까? 후배도 신기한 듯 지훈 씨를 흘깃흘깃 보는 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지훈 씨를 집으로 돌려보내야 할 거 같다. 손님들도 심지어 직원분들도 모두 지훈 씨에게 한눈이 팔리느라 병원이 너무 어수선하다. 나는 아이를 달래듯이 지훈 씨를 겨우 달래서 집으로 돌려보냈다. 아쉬워하는 그의 눈빛에 또 한 번 가슴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지만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 어차피 그의 오늘은 내 것이니까.
나는 일을 하는 중간에 지훈 씨에게 문자를 보냈다.
[다애는 새엄마에게 맡기고 차도 빌릴 거예요. 내일 같이 여행 가요. 어때요?]
잠시 시간이 지나고 지훈 씨에게 답장이 왔다.
[내가 차를 탈 수 있을까요? 아직까지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는데.]
[어차피 언제 죽을지 모른다면서요? 같은 차를 타고 같이 죽는다면 오히려 좋은 거 아닐까요? 적어도 함께할 거니까.]
[저만 살면요? 소희 씨만 죽고 나만 살면 어떻게 해요?]
[그러면 오늘이 내가 죽기 전 가장 행복한 모습이 되겠네요. 오늘의 내 모습을 기억해 줘요. 그러면 되잖아요.]
[그래도 그 많은 방법 중에서 차사고로 죽는 걸 보는 건 싫어요. 그냥 다른 방법으로 죽으면 안 될까요?]
[차를 탄다고 다 죽는 건 아닌 거 알죠? 그리고 내가 원하는 건 다해준다면서요. 혹시 거짓말이었어요?]
[알겠어요. 약속 지킬게요.]
저녁에 지훈 씨와 함께 본가를 찾았다. 새엄마에게 다애를 맡기며 차를 빌렸다. 새엄마도 지훈 씨를 보며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다. 나는 재빠르게 상황을 종료하고 차를 운전하여 우리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와 지훈 씨만 있는 집은 조금 분위기가 달랐다. 나는 더 지훈 씨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다음날 우리는 조금 늦게 여행에 나섰다. 지훈 씨는 차에 타자마자 눈을 감고 힘들어했다. 난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운전을 하는 내내 나는 지훈 씨를 달래주었다.
“괜찮아요. 혼자가 아니잖아요. 나랑 함께해요. 내가 힘들 때는 지훈 씨가 위로해 주세요. 지금은 내가 지훈 씨를 위로할게요. 정말 다 잘될 거예요. 어떤 일이 생기든 우리는 그냥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에 최선을 다하면 그뿐이에요. 그냥 결과는 받아들이기로 해요. 설사 그 결과가 우리의 죽음이라고 할지라도.”
그는 내 목소리를 들으며 이내 잠이 들었다. 지훈 씨는 이번 여행을 위해서 아침에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고 약도 처방받았다. 지훈 씨가 잠든 게 약기운 때문인지 내 목소리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나는 잠든 지훈 씨를 흘깃흘깃 바라보며 행복할 뿐이었다.
별장에 도착하기 전 간단하게 마트에서 장을 보기로 했다.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을 보내고 우리는 별장에 도착했다. 내 기억 속의 모습 그대로였다. 변한 건 나뿐이었다. 관리하는 분이 계셔서 정원도 잘 가꾸어진 모습이었다. 아버지는 엄마의 일 이후에도 이 별장을 팔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곳에 오는 것도 아닌 거 같다. 왜 놔두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난 지훈 씨에게 말해주었다.
“아버지는 여기 별장에서 엄마가 사고를 당했다고 해요. 그런데 난 분명 기억해요. 이 별장은 엄마 죽음과 관련이 없어요. 그래도 혹시 몰라서 와보고 싶었어요. 만약 아버지말이 사실이라면 이곳에 왔을 때 무엇인가 떠오르는 게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지훈 씨는 말없이 내 손을 잡아주었다. 우리는 간단하게 짐을 풀고 계곡에도 다녀왔다. 역시나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곳에 와서 더 확실해졌다. 내 기억이 맞다. 아버지가 거짓말하는 게 분명하다.
[ 19화로 이어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