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렌이 기억하는 깊은 숲 속의 별장
세상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내가 예쁜 것도 부자인 것도 모두 축복이라고. 그렇게 다 가져놓고도 감사할 줄 모르면 그건 성격에 문제가 있는 거라고. 조건 없는 관심과 사랑에 항상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항상 친절하고 예쁜 미소를 유지하라고 말이다. 물론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먼저 내가 부자인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태어나다 보니 사실 조금 무감각한 것이 사실이다. 내가 특별히 가진 것을 부정하면서까지 일부러 힘든 길을 선택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 감사하고 겸손해야 한다는 말은 어느 정도 동의한다. 하지만 그 대가인 듯 받게 되는 아버지의 억압이 싫어 지금은 나의 힘으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간접적인 것까지 이득이 없다고 하는 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적어도 내 양심에 거리낄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내가 죽어서도 벗어날 수 없는 외모평가이다. 흔히 남자에게서만 평가받을 거라고 착각할지 모르겠지만 아니다. 남자든 여자든 어른이든 아이든, 내 주변에 숨 쉬는 모든 인간들은 나의 외모에 대해 이야기한다. 심지어 나를 욕할 때조차 외모를 언급한다.
참 어이없고도 재미있는 사실은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내가 예쁘다는 것을 충분히 누리고 이용하기로 생각했다면 그건 어마어마한 축복이 맞다. 조건 없이 사랑받고 이유 없이 친절을 경험할 테니까. 숨만 쉬어도 사랑받으니까. 그리고 그런 삶을 살았던 건 나의 엄마였으니까.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의 외모만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 사람. 난 엄마가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엄마가 예쁘지 않았어도 나는 엄마를 사랑했을 거니까. 그렇게 내가 엄마를 사랑한 것처럼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고 있다. 그것을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안다. 누군가 내 외모가 아니라 나의 내면을 보고 사랑한다고 한들 믿을 수 있을까? 절대 못 믿었겠지. 차라리 솔직하게 예뻐서 좋다고 이야기하는 게 낫다고 말할 테니까. 그런데 그 어려운 문제의 답이 사실 존재했다. 내가 누군가를 먼저 미친 듯이 사랑하게 된다면 해결될 문제였다. 내가 먼저 그를 사랑하게 된다면, 그가 나의 어떤 면이 좋아서인지는 상관없게 되는 것이다. 그저 나를 바라봐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난 처음에 지훈 씨가 나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서 좋았다. 어떤 말로도 나를 평가하지 않았으니까. 어떤 위로의 말도 하지 않았고, 어떠한 상처 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손을 내밀고 그 손을 잡았을 뿐이었다.
별장에 와서 계속 엄마를 생각하며 보냈다. 내가 완전히 현실을 잊지 않도록 지훈 씨는 내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 덕분에 나는 현실에서 발을 완전히 떼지 않을 수 있었다. 아니라면 지훈 씨의 말대로 그의 저주에 희생냥이 되었겠지.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다음날 어떻게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걸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이정훈 변호사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일전에 내가 말한 엄마에 대한 증거를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그 증거는 멀리 있지 않았다. 별장을 관리해 주시는 분에게서 사실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뉴스에서 한참 떠들던 것처럼 엄마와 내가 여기에 놀러 온 게 아니란 사실을. 엄마가 이 별장에 온 것은 차가운 시체가 되어서였다. 별장지기 아저씨는 죽기 전에 나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다고 하셨다. 아저씨는 엄마가 죽어서도 이용되고 소모되는 것 같아 보여 계속 마음이 불편하다고 하셨다. 마지막으로 예전에는 아버지가 두려워 말을 못 했지만, 이제 살만큼 살아서 더 이상 두려울 게 없다고 하셨다. 난 감사하다며 아저씨의 손을 잡아드렸다. 이로써 나는 확실하게 진실을 알게 되었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것이 사실이다. 내가 꿈꾼 것이 아니다. 내가 본 것이 곧 현실이었다. 엄마는 죽음조차 이용당했다. 아버지를 위해 죽어서조차 세상에 전시되었다. 아버지와 불행한 삶을 살다가 자살했다는 사실을 감추고, 예쁘고 행복했던, 하지만 불의의 사고를 당한 불쌍하고 예뻤던 사람으로 전시되었다.
난 이변호사님에게도 감사하다고 말씀드렸다. 어쨌든 이 진실을 찾게 도와주셨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였다. 지훈 씨의 곁에 있는 사람이 이상한 사이코패스는 아니라는 사실말이다. 그가 법망을 피해서 여러 가지 일들을 하는 건 맞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무서운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분이 좋은 것은 지훈 씨가 이변호사님에게 아직까지 한 번도 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열심히 핸드폰으로 글을 적어 보여주고 있었다. 지훈 씨가 목소리를 들려주는 대상은 세상에서 나 하나이다. 나만 그의 목소리를 듣고도 살 수 있다. 난 그렇게 믿기로 했다. 내 믿음이 곧 현실이 될 테니까.
어제까지만 해도 세상과 단절된 저세상 같은 분위기의 별장이 오늘은 고요한 천상에 세워진 성 같았다. 우거진 숲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은 오후나 되어야 겨우 빛을 허락했지만, 그마저도 나에게는 치유의 공간이 되어주었다.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이렇게 당연한걸 왜 잠시라도 의심했는지 의문이다. 이제 그만 생각하고 나는 그에게 집중하리라 생각했다. 그의 표정하나, 몸짓하나에도 나는 설레는 걸 느낀다. 그도 나와 같은 마음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가도 잠시 불안한 마음도 함께 나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이르기 전에 나는 그의 품에 파고들며 그의 온기를 온몸으로 나누어 받았다. 생각해 보면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내가 가진 오감 중에서 촉감은 잊혀버린 감각이었다는 생각조차 들었다. 누구를 만져도 차갑던 내 마음이 지금은 그를 통해서 따스함을 느낀다. 나는 불현듯 그에게 말했다.
"나를 사랑한다는 말 진짜예요?"
"난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아요. 내 말로 누군가는 죽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믿어줘요."
"좋아요. 나를 사랑하는 걸 허락해 줄게요."
"소희 씨는요? 나한테 할 말 없나요?"
"음... 나한테 하는 거 봐서 말해줄게요. 조금 더 기다려요. 나는 아직 말하기 부끄러우니까."
그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며 내 머릿결을 따라 나를 위로해 주었다. 난 그의 손길에 잠시 시간을 맡겼다. 이럴 줄 알았다면 후배에게 며칠 더 부탁할걸 그랬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우리는 차에 올랐다. 한참을 숲 속을 지나자 도로가 나온다. 옆에서 눈을 감고 있던 지훈 씨가 뜬금없이 말했다.
"아 약 먹는걸 깜박했어요. 그런데 지금 아무렇지도 않아요. 소희 씨 때문이겠죠?"
"그래도 의사 선생님 말대로 당분간 꾸준히 치료받아요. 내가 같이 가줄게요"
지훈 씨가 운전하는 내 옆에서 잠드는 게 보인다. 그는 지금 행복한 꿈을 꾸는 거 같다. 그는 지금 웃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미소에 나는 눈물이 났다.
[ 21화로 이어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