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코 엘리시움
‘나는 누구인가?’는 인간이라면 평생 고민하는 질문이다. 그만큼 답을 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자의식이 강해지는 청소년 시기 때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고민이 생기거나 선택을 해야 할 때면 답도 없는 이 질문이 또 올라온다. 시점에 따라 상황에 따라 어떤 모습이 진짜 나의 모습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예를 들어, 어렸을 때는 나서길 좋아했는데, 어른이 되고 나니 안 그렇다. 나는 원래 외향적이지만 내향적으로 바뀐 건지, 아니면 원래 내향적인데 어렸을 때는 관심 끌기 위해서 과잉 행동을 했던 것인지 모르겠다.
물론 나는 내 MBTI를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어떤 패턴으로 반응하는지를 설명해 주는 것이지 ‘나 자체’는 아니다. 내가 외향적(E)인지 내향적(I)인지도 맨날 헷갈린다. 이럴 때는 외향적인 것 같고 저럴 때는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기호는 어떨까? 다양한 분야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은 분명하게 얘기할 수 있다. 음식, 놀이, 성격 등등. 이건 데이터가 많아서 헷갈린다. ‘매운 음식을 좋아한다’, ‘온라인 게임을 좋아한다’, ‘재미가 중요하다’ 이 문장들이 나에 해당하는 것은 맞는데 의미가 있으려면 뭔가 해석이 필요하다. 그러고 보니 지난주에 직업심리검사 해서 흥미코드가 나오고 추천 직업을 받긴 했는데 특별히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다.
매 번 이런 식이다. 여러 검사를 해봐도 참고용일 뿐 딱 ‘나’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내가 너무 삐딱한 걸까? 우유부단한 걸까? 아니, ‘나는 누구인가?’를 아는 게 가능한 일이긴 할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정확히 답할 수 있는가?>
(「세계의 교양을 묻는다 2(인문학편)」, 휴머니스트, 최영주 편)
①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만이 아니며 정념과 환경, 알코올 등에 의해 좌우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이성을 벗어나는 것, 즉 무의식과 욕망에 의해 행동하는 나를 어떻게 이성이 모두 포착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내가 좋아하는 것, 하고 싶어하는 것을 알 수는 있지만 그렇게 간절히 바라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거짓말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스스로에 대한 환상과 무지에 사로잡혀 있으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을 파악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보통 거짓말하는 대상이 타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스스로를 속일 수 있다.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기 위해 혹은 자신의 위선을 정당화하기 위해 우리는 가면을 쓴 채 스스로를 바라보기도 한다. 받아들여야 할 진리가 너무 가혹하거나 현실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울 경우에도 우리는 스스로를 기만한다. 가령 현실적·심리적 이유 등으로 의무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자신의 인간관계는 원만하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는 경우나 어린 시절의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과거의 경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그 대표적 예이다. 사실 사회적 삶을 영위하기 위해선 항상 정직하기보다는 부분적인 은닉과 거짓이 필요하기도 하다. 말하자면 자신에게 거짓말하는 것은 의도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은폐나무지라고도 볼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유리한 것에만 관심을 갖기 때문에 스스로에 대한 객관적 시각을 갖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욕망에 의해 나의 시각은 자주 왜곡되며 모두가 인정하는 명백한 사실도 나는 부인하고 거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랑에 빠진 연인은 누구의 충고도 듣지 않을 것이며 자신들의 사랑을 가장 완벽한 것으로 착각하게 될 것이다.
② 스스로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것은 자신의 단점과 장점, 능력, 취향 등에 대해 명확하게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무조건 자기 자신을 열심히 관찰하고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는지를 골몰히 생각하는 것만으로 스스로에 대해 보다 확실한 앎을 갖게 될까? 오히려 내가 보지 못하는 부분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타인이 나를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를 제대로 인식하려면 타자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부버(M. Buber)는 《나와 너》에서 '너'라고 부르는 타자와의 만남과 응답을 통해서만이 '나'는 비로소 진정한 '나'가 된다고 말했다. 헤겔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은 그것이 타자의 대답과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때라야 실재한다고 설명했다. 타자가 없다면, 즉 누구도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면 아무리 자아성찰에 치중한다 해도 나는 나를 제대로 인식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변적이기만 한 자기 인식은 현실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를 착하고 영리하고 아름답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평가가 타인들의 동의를 얻지 못한다면 나에 대한 앎은 착각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그리고 이 경우 내가 스스로에 대해 안다고 확신하면 할수록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이처럼 타인이 없다면 나 자신에 대한 나의 앎은 독단이나 환상에 머무를 위험이 크다. 우리는 주위 사람들의 객관적인 시야를 통해서만이 스스로에 대한 인식을 수정할 수 있다. 변해 가는 시간 속에서 타인과 끊임없이 충돌하고 부딪히면서 구축된 구체적인 나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진실된 자기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을 발견해 가는 것은 타인과 함께, 타인 덕에 자신의 미래와 과거를 이해해 나가는 것이다.
③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정확히 답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만약 그런 확신을 갖는다면 그것은 교만한 환상, 혹은 허무한 항진명법에 불과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나는 누구인가’보다는 ‘나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가’이다. 사회, 그리고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검토하고 비판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자아에 이를 수 있다.
* 밑줄은 제가 그었습니다.
Q. ‘나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가’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가’를 보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해왔는지를 봐야 한다. 학교 선택, 전공 선택, 직장 선택 등 지금의 나를 있게 한 큰 선택들은 금세 떠오를 것이다. 좀 더 디테일하게 보면 내가 주체적으로 했던 모든 시도들-반항, 갈등, 사랑고백 등-과 반대로 시도하지 않은 일들이 다 나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이 선택의 결과로 내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일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00검사(테스트)도 마찬가지로 나에 대해 말해주지만 선택과 검사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누적된 맥락’의 유무이다. 검사는 해당 시점의 나에 대한 정보를 준다. 이전의 검사와 현재의 검사는 각각 독립적이다. 선택은 역사가 있다. 이전의 선택에 따른 결과와 시행착오들이 나의 의식, 무의식에 남아 있다. 지금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은 이전 선택들의 연장선에 있다.
Q. 그럼 앞으로 다양한 선택을 경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모든 것을 직접 경험할 수는 없다. 소설, 영화, 드라마, 게임 등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통해 간접적으로 선택을 경험한다. '나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할까?'를 생각하는 것은 인간에게만 주어진 '상상력'을 활용하는 즐거운 일이다. 그중 가장 강렬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은 게임이다. 다른 콘텐츠는 관객이 되어 구경하지만 게임은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를 직접 선택하여 이끌어 나가기(또는 나간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선택을 경험하는 방법으로 게임을 추천하는 이유다.
선택에는 탐구가 따른다. 선택을 잘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정보가 있어야 한다. 모르는 부분이 있다면 탐구하게 된다. 탐구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인터넷, 책, 사람들에게 질문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생각과 마음에 대해서도 확인하기 위해 자문자답 하게 된다. 여기에 직관이 작동해 최종 선택을 한다. 탐구하기, 그러기 위해 질문하기. 이 두 가지를 연습하는 게 선택을 연습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탐구하기, 질문하기에 최적화된 게임이 있어 소개한다.
이름 : 디스코 엘리시움 ( Disco Elysium ) / 청소년 이용불가
제작사 : ZA/UM
장르 : RPG
출시일 : 2019년 10월 15일 (최초 출시일)
*게임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다른 사이트를 참조하세요
시놉시스
세계의 수도였으나 이제는 쇠락한 도시 "레바숄". 노동조합에 의한 파업이 벌어지고 있는 항구지역 "마르티네즈"에 위치한 호스텔 "넝마 두른 소용돌이(Whirling-in-Rags)"의 뒤편 공터에 시체가 목이 매달린 사건이 발생한다. 몇십 년간 무정부 상태에 방치된 레바숄에서 유일하게 기능하는 행정/치안 조직인 RCM(레바숄 시민 민병대, Revachol Citizens Militia)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41번서와 57번서에서 각각 수사인력을 파견한다.
그리고 당신은 엄청난 숙취 속에서 반쯤 벌거벗은 상태로 깨어난다. 현재도 과거도, 심지어 자신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모두에게 "형사"라고 불리는 당신은 살인사건의 진상과 자신의 과거 모두를 알아내야만 한다.
이 게임은 특별하다. 대사 분량이 100만 단어(최종판 기준)가 넘는다(이 정도 대사 분량을 가진 게임은 플레인스케이프:토먼트, 발더스게이트2, 폴아웃, 엘더스크롤:스카이림 정도이다.) 그리고 모든 음성을 녹음했다. 말과 글에 얼마나 진심인지 알 수 있다. 게임의 진행 대부분을 말과 글로 한다. '음... 지루할 것 같군. 나는 책을 읽으려는 게 아니라 게임을 하려는 거야'라고 생각하실 것 같다. 그렇다. 너무나 많은 대사에 압도되고 읽다가 지친다. 그런데 계속 이야기를 진행하고 싶어 진다. 마주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커진다. 플레이어가 관객이 아니라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파업문제로 예를 들어보겠다. 이 게임에서 노동조합의 파업은 중요한 사건이다. 형사인 주인공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탐문해야 한다. 자본가의 입장, 노동조합의 입장, 노동조합을 파괴하는 구사대 등을 만나며 당신의 생각과 입장은 무엇인지 질문받는다. 이건 인터넷에 있는 '정치성향 테스트'와는 다르다. 그냥 평소의 생각을 묻는 게 아니다. '마르티네즈' 지역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형사로서,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판단해야 하는 '맥락'이 있는 문제다. 세상에 맥락 없는 일은 없다. 그러나 바쁘게 사는 우리들에게 그 맥락을 다 확인할 물리적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없다. (이를 노려 언론에서는 앞뒤 맥락을 다 자르고 자신의 관점을 욱여넣는 사례도 많다.) 그런데 이 게임은 문제에 내가 직접 빠져들게 된다. 그 비결은 계속해서 '왜' 그런지 찾아가게게 만드는 질문에 있다. 평소에 단순하게 '노조는 나빠' 또는 '노조가 있어야 해'라고 이미 자기 입장이 있는 사람이라도, 맥락을 따라가다 보면 정 반대의 입장을 취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게임의 시작과 끝은 계속된 질문이다. 내가 타인에게 그리고 타인이 나에게 질문한다. 게임을 진행하는 유일한 방법은 계속해서 질문과 답을 선택하는 것이다. 투박하지만 설득이 된다.
게임 스토리의 후반부 전개와 다회차 플레이의 매력이 떨어진다는 점이 아쉽다는 평가가 있다. 가격으로 가치를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지만, 게임 가격(4만원대)을 훨씬 뛰어넘는 경험을 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질문들에 대해 생각을 해 볼 수 있게 한 것만으로도 이 게임은 특별하다.
'나는 누구인가?'는 알기 어렵다. 사는 내내 계속해서 풀어가야 한다. '인생질문에 게임이 답하다'는 말머리를 달았지만 게임 자체에서 답을 내려주지 않는다. 이 게임이 답을 내려주길 기대했다면 죄송하지만 오히려 답을 주는 게 사기꾼 아닐까? 답은 각자의 몫이다. 이 게임의 역할은 탐구의 경험이다. 플레이어가 이 게임을 통해서 수많은 질문을 주고받으며 나, 인간, 그리고 세상에 대해 탐구해 나갈 뿐이다. 이 게임을 하고 나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하는지, 어떤 식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풀어가려 하는지 나에 대해 훨씬 더 잘 알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이게 바로 이 게임의 답이다.
- 디스코 엘리시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