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우리 두 눈에 덧댄 안경
화면 또는 인쇄 등에서 이미지의 정밀도를 나타내는 지표
어릴 적에 누나가 가방에서 하얗고 도톰한 무언가 꺼내는 것을 보고
"누나 뭐 먹어? 혼자 빵 먹으려고 그러지?"
하며 다가갔다가 눈앞이 순간 번쩍인 적이 있었다.
순간의 일격이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억울함에 눈물 찔끔거릴 때, 누나가 말했다.
"먹어 이 새꺄. 먹어."
한참을 그 빵을 까고 또 까보았는데, 알맹이가 없다.
불량품.. 못 먹는 거..
누나가 가방에서 꺼내던 것이 여자들만 먹을 수 있는 빵..
생리대인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에 알게 되었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일까?
아내가 가끔 그 빵 먹는 게 본능적으로 부러울 때가 있다.
그 당시 나는 내 이름이 '이 새끼'인가 부모님이 불러주시던 '율공'(이거 본명 아니다)이가 내 이름인지 유아원(유치원 아니다) 선생님이 불러주시는 'ㅇㅇ이'(이게 본명이다)가 내 이름인지 잘 몰랐다.
빈도수로 따지면 '이 새끼'가 가장 많았다.
나의 육아담당, 11살 많은 내 누이가 거의 매일 도끼 닮은 눈 치켜뜰 때 들을 수 있는 호칭이었으므로..
빗자루가 엉덩이에 찰싹찰싹거리거나, 꿀맛 나는 밤을 정수리로 받아먹는다던가 하며 울어대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만 5세 어린양 시절 말이다. 지금 생각해도 하나도 안 억울한 것을 보면, 맞을 만했었다 싶다.
나를 키운 건 8할이 내 누이의 도끼눈이었을까?
그때, 내 생의 해상도는 딱 그만큼 이었다.
먹는 거, 못 먹는 거, 누나만 혼자 먹는 거, 나는 못 먹는 거.. 뭐 이 정도.
딱 그만큼 보였다.
중2로운 학생나라에 살 적에는,
세상 사는 내 주변 모두가 나를 불편하게 만들고, 나의 진가를 알아봐 주지 못하며 심지어 내가 아는 것조차 모르고 사는 어른들이 한심해 보이기까지 했다.
물론 지금은 그때가 떠오를 때면 흠칫 놀라 이불을 찬다.
딱 그만큼 보였다.
왜 이름이 고등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 고등교육과정에 입학하여 전국 900만의 아이들의 일원으로서 머릿속에 모두 똑같은 것을 주입받던 그 시절에는 "왜?"병에 걸려서 '왜? 내가 홍성대 씨가 저술한 수학의 정석에 코를 박아야 하는가? 코 박았는데, 왜 나만 이걸 이해 못 하나?' 등등되지도 않은 생각 하며 동네 포장마차에서 부잣집 내 친구와 코알라가 될 때까지 소주병 깔짝거리기도 하고,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았으면서도 그러고 있었기에 파출소에 끌려가보기도 하고..
뭐 엉망진창 지내다 주식마냥 반토막난 성적 겨우 겨우 추슬러 정릉동에 있는 큰 학교(클 大자인데, 학교는 한 자리에서 고개 돌리면 다 볼 수 있을 만큼 작다)에 갔었더랬다.
그때도 딱 그 정도 보고 살았다.
낮은 해상도..
때마다 난 그 낮은 해상도로 딱 그만큼만, 콩만 한 세상 보고 살면서도 그게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지냈다.
그 작은 화면 속에서 울고 웃고 지지고 볶고 그렇게..
하루하루 침 질질 흘리고, 다리 질질 끌고 다니며 출퇴근을 일삼는 자가 된 오늘의 나는..
어른이 되면 세상을 좀 알게 될 줄 알았는데 피로를 알게 되었고, 유려한 D자형 몸뚱이(저울에 달아보니 140근 정도 나오더라)를 덤으로 얻었다.
늘 내 눈앞 세상 저 넘어가 궁금했다.
그 넘어 세상에 빨리 속하고 싶었다.
마음이 조급해져서 앞 뒤 안 가리고 빨리 저 넘어 어른들의 세상에 살고 싶었다.
이것저것 잡동사니가 쌓여가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모른 척했다.
그랬더니 마주한 해상도 높은 이 어른이들의 세상에는 구석구석 불량 화소에 노란 딱지 붙여야 할 만큼 유해한 풍경이 넘친다.
눈을 감는다. 숨도 후후 고른다.
화면조정 좀 하고 다시 눈을 떠 보려 한다.
아니, 이제는 화면조정이 꼭 한 번쯤 필요한 시간이 왔다.
켜켜이 쌓인 것은 치워내기 어렵기 마련이지만,
그간 조급함으로 쌓아 놓은 잡동사니들과 오물들을 치워낼 요량이다.
감았던 눈 다시 눈을 떴을 때,
화면만 큰 세상이 아닌, 진정 맑은 고해상도 세상을 마주하고 싶다.
그리고.. 주인공은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