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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침잠mania 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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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현주 Jul 13. 2022

초등학생의 행위주체성 세우기

'열심초딩'의 침잠을 통한 자아 정립

집에서는 아무도 내게 공부하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하고 싶고 좋아하니까 할 뿐이었다. 부모님은 한 살 터울인 언니와 내가 서로 샘내고 다툴까봐, 간식이며 장난감을 항상 넉넉하게 마련해주셨다. 우리는 키도 체중도 비슷했지만, 나는 일 년 후에 언니 옷을 물려 입지 않았다. 엄마는 언니와 내게 백화점에서 똑같은 옷을 함께 사주셨다. 매일 옷과 어울리는 모자까지 맞춰 쓰고 등교하면 완성된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꽤 좋았다. 담임뿐 아니라 다른 반 선생님들도 복도에서 가끔 내게 여동생이 있냐고 물어보셨다. 없다고 말씀드리면 나중에 옷을 줄 수 있냐는 농담을 얹곤 하셨다. 선생님들의 관심과 믿음을 담뿍 받는 나를 향한 친구들의 시선은 항상 다정했다.     



4학년이 되던 해 가을, 등교해서 교실에 들어서니 여학생들이 예닐곱 명 떼로 모여서 웅성대고 있었다. 뭐 하고 있냐 물으니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를 자기들끼리 세고 있었단다. 그들이 말하는 ‘나’는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하고, 그것도 잘하는 사람이었다. 한참 동안 장점을 줄줄이 늘어놓다가 마지막에는 무릎을 탁 치면서 외친다. 


팔방미인이 아니라
십칠방미인이라면서 다들 깔깔거렸다. 


순간 기쁘기도 했지만 다소 충격이었다. 평소에 친구들이 나를 무척 따르고 좋아해 주는 건 대충 알고 있었지만, 과분한 인정에 나는 짐짓 두려웠다. 집에서의 나는 학교에서처럼 마냥 의젓한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학교에서의 수행에 완벽을 기하기 위해 상당한 에너지를 썼다. 나와 선생님과 친구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는 심적 부담감과 육체적 피로감은 집에서의 응석으로 환원되었다. 피곤한 나는 엄마에게 투덜거리거나 화를 냈고, 만만한 언니에게는 욕도 해가면서 다투었다. 


이렇게
학교와 집에서
치환과 환원을 반복하며 내 나름의 균형을 잡아나갔다.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내게 신과 같은 존재였다. 나는 선생님 말씀을 금과옥조처럼 새기고 철저하게 실천했다. 그런 나를 선생님은 총애하셨고, 그 모습은 다른 친구들에게도 전염되었다. 완벽한 모범생을 자처한 나는 친구들의 부탁을 뭐든지 다 들어주었다. 내 입이 거절을 얘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한 날은 선생님이 선행상을 뽑아야 한다며, 무슨 용지를 가져오셨다. 착한 행동 사례에 대한 질문 대신, 아이들에게 누가 받으면 좋겠냐고 대뜸 물으셨다. 어떤 아이가 내 이름을 말하니, 선생님은 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을 들라 하셨다. 대부분 아이들이 손을 들었고, 나는 선행상을 받았다. 상은 물론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날 내 기분은 무척이나 찜찜했다. 


인기상을 가장한 선행상인지,
내가 정말 착한 사람인지,
 
과연 나는
친구들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혼란스러웠다.


모범생이라는 완벽한 역할을 수행하기로 결심한 것은 순수한 나의 의지다. 의지의 발로는 성실한 노력이었고, 그 노력의 결실은 칭찬과 인정이었다. 결실은 너무나 달콤해서 어린이의 의지에 더욱 불을 지폈다. 화염처럼 달아오른 자신감은 이상적인 자아상을 만들고 한 치의 어긋남도 용납하지 않았다. 스스로 세운 결심에 따른 책임감의 무게를 순수한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설렘으로 시작해 기쁨을 누렸지만,
기쁨은 욕심을 생성하고 욕심은 나를 매섭게 다스렸다. 



특별한 사람이 되기 위한 특별한 노력은 너무나 당연했지만, 동시에 가혹한 것이기도 했다. 스스로 초래한 혼란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하여, 생각 구렁텅이에 풍덩 빠졌다. 우리 집 정원에 흐드러진 꽃나무들을 조용히 바라보며, 혼자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보면 내 마음의 깊은 물 속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꼬마 사회인으로 최선을 다하던 ‘열심초딩’은
침잠을 통해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말 걸며 사색한 끝에,
두 개의 자아를 인정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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