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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Mar 07. 2024

아버지 뻘이 동네형이 되는 순간

"이따금씩 삶이 힘들다고 느껴질 땐 동네 형이라고 생각하고 연락 주세요."


환갑을 갓 넘기셨지만 빛나는 두 눈동자가 예사롭지 않았던 김 접장님의 말씀이다.



김 접장님은 나와 같은 스승님께 전통 활쏘기를 배웠고, 지금도 계속해서 배우고 있는 도반 관계다. 스승님은 기수가 달라도 나이가 달라도 도반끼리는 수평적인 관계임을 강조하신다. 그는 스승님의 말씀을 철석같이 잘 따른다. 하지만 그의 눈을 보면 그것이 단지 스승님의 가르침이기 때문만은 아님을 대번에 알 수 있다. 나이로 치면 아버지뻘 되시는 분인데도 그는 밝게 빛나는 눈을 지녔다. 나는 내 주변에서, 내 동년배까지 다 통틀어도, 그보다 더 초롱초롱한 눈빛을 지닌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아 그래도 이 분은 못 이기지 ⓒ쿠팡플레이


나와 같은 지역에 살지만 나이차가 많이 나기도 하고, 서로 일이 바쁘다 보니 우리 둘의 심리적 거리가 가깝지는 않은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는 우리 활터에 업무 차 방문한 일이 생기자, 그의 말을 빌리자면 '어리기에 더 다가서기 조심스러운' 젊은 접장에게 함께 활을 쏘고 식사도 하자며 연락을 해왔다.



전통 활쏘기를 배우고 나서부터는 여건이 될 경우에 가급적이면 활을 쏠 때는 생활한복을 입으려고 신경 쓰는 편이다. 나와 같은 도반들은 웬만하면 활을 쏠 때는 한복을 입는다. 늘 혼자만 한복을 입고 활을 쏘다가 김 접장님을 만나니  나와 같은 복장을 한 사람이 한 명 더 늘어서 참으로 든든했다.



금전적 부담을 핑계로 전통 활인 각궁(소뿔로 만든 전통 방식의 우리 활)'과 죽시(대나무로 만든 화살)를 쓰는 것은 늘 미루는 나에 비해, 그는 장비까지 '각죽'을 갖추고 궁대(허리에 매는 띠로 활을 쏠 땐 화살을 여기에 끼워 고정한다)에는 작은 살수건(화살에 묻은 흙과 먼지 등을 닦는 개인 수건)까지 갖추고 있었다. 활쏘기에 임하는 그의 경건한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었다.



나는 '사형'이신 김 접장님보다 혹시나 늦지는 않을까 30분 정도 일찍 도착해서 활을 내고 있었다. 그런데 총 세 순(한 차례, 한 번에 5발을 쏜다)을 쐈는데 모두 불(不)이 났다. 아니 아무리 한 달 만에 왔다고 해도(핑계다) 이렇게나 안 맞아서 쓰나. 마음속은 수치심과 자기비판으로 요동 쳤지만 애써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은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척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김 접장님, 그리고 평소에 나를 살뜰히 챙겨주시는 부사두(활터의 부대표 격)님과 셋이서 함께 활을 내는데 분위기가 확 달라짐을 느꼈다. 내가 좋아하는 분, 그리고 같은 곳을 바라보는 도반과 함께 쏜다는 사실 때문이었을까. 애써 유지했던 마음의 평정이 이 분들과 함께하는 동안에는 저절로 유지가 됐다. 마음의 안정이 찾아오자 좌로 우로 줏대 없이 나가던 화살의 쏘임새도 자연스레 안정을 찾아갔다. 사람이 발산하는 보이지 않는 기운이 분명 존재함을 느낀 순간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함께 활을 쏘는 이가 누구냐에 따라 느껴지는 분위기나 기운의 양상의 차이를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우리 마지막 순은 막걸리 내기 합시다!"


김 접장님의 제안에 처음엔 짐짓 망설였던 것이 솔직한 심경이었다. 아버지뻘 되시는 분과 술상에서 무슨 얘기를 나눈단 말인가. 그러나 이 또한 내게 괜히 일어나는 일이 아닐 거라 생각하며 짧은 고민을 뒤로하고 흔쾌히 제안을 수락했다. 그렇게 우리 셋은 활터에서 막걸리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안주도 맛있고, 가게에서 직접 만든다는 뽀얀 빛의 막걸리도 맛있었다. 한 3시간이 지났을까. 안주가 가득하던 접시는 깨끗이 비워지고 연거푸 비워내던 막걸리 병들과 다르게 이야기 꽃은 시들 줄은 몰랐다. 무슨 대화를 할까 고민했던 것이 무색할 만큼 30대, 40대, 60대의 세 남자는 그 시간을 오직 활 얘기로만 가득 채우고야 말았다.



흡사 도원결의를 방불케 한다



보통 나보다 나이가 5살만 많아도 대화라기보다는 일방적 조언과 자신이 얼마나 고생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룬다. 그런데 이 술자리는 전혀 그런 것이 없었다. 활 이외의 개인의 사생활에 대한 허공에 뜨는 질문들도 없었다. 충분한 라포가 형성되지 않았을 때 주고받는 소위 '호구조사'와 같은 질문은 얼마나 공허한가. 어쩌면 명절 때 세대 간의 불통과 잔소리는 서로 간 공감대의 부재 탓이 더 큰 것일지도 모른다.



활에 관한 한 이들의 열정이 내가 지닌 것보다 훨씬 더 크기나 뜨거움 면에서 앞섰다. 활 하나에도 한창인 젊은이보다 빛나는 눈을 하며 몇 시간을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 다른 분야라고 다를쏘냐. 하나를 보면 열을 아는 법이다. 조지 버나드 쇼는 말했다, 늙어서 놀기를 멈추는 것이 아니라, 놀기를 멈춰서 늙는 것이라고. 그 눈동자에 담겨 빛을 발하던 뜨거운 순수가 지금도 기억이 난다. 그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면 내 안에도 뭉근한 열기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김 접장님은 자신보다 20~30살은 더 젊은 두 궁사들에게 단 한차례도 어영부영 반말을 하지도 않았다. 그런 겉모습이 자신의 됨됨이를 보여준다고 믿기 때문에 강박적으로 존댓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평상시의 마음가짐이 자연스럽게 그런 존중의 말투를 만드는 것일 따름이다. 그는 자신보다 나이가 어려도 선배 도반이라면 '사형'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러면서 나에게 같은 동네에 사는 '형(형님이라고 하지도 않는다)'으로서 '사제'를 잘 챙기지 못해 미안하다는 과분한 말로 되레 나를 몸 둘 바를 모르게 만들기도 했다.



남성들의 술내 풍기는 수다의 밤이 지나고 해가 뜨면 다시 어색함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나는 여전히, 그리고 짐작컨대 아마도 그 역시, 서로에 대한 심적 거리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눈빛이 남긴 잔상 역시 내 가슴속에 남아 아른거린다. 우리는 다시 서로의 일상으로 돌아가 원래도 그러했듯 한동안 서로의 존재에 대해 잊고 살 것이다. 하지만 그 잔상은 분명 그 자리에 존재하던 세 사람의 관계가 이미 그 전과 같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원래 나는 맥주파였다. 그런데 활을 쏘면서 이상하리만치 막걸리를 찾는 빈도가 늘었다. 그날 마신 막걸리는 그 어떤 막걸리보다도 부드럽고 달콤했으며 숙취마저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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