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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다로 Jun 29. 2024

병자호란 이후 최명길과 김상헌의 후일이야기

병자년의 두 충신

병자호란에 맞서 보국의 길은 달랐지만, 결국 애국의 뜻은 같았던 두 충신의 후일담에 대해 써보고자 합니다.

인조가 결국 성밖으로 나와 삼배구고두례를 행할때 김상헌은 고향인 안동으로 낙향하였다고 했는데요. 이는 신하들 사이에서도 비판을 많이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인조 역시 김상헌에게 많이 실망했다고 이야기했다고합니다.

재밌는 사실은 최명길의 현실적인 판단으로 인해 나라의 사직을 보존하게 되었음에도 대소신료들은 최명길을 나라의 배신자라 욕을 하였고, 김상헌은 임금 곁에 마지막까지 남아있지 않았다고 욕을 했다는거죠. 명분과 실리로 대표되던 두 신하 입장에선 속이 쓰릴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참고로 최명길도 김상헌에 대해 쌓인것이 많았던것은 분명해보입니다. 김상헌이 가족들을 마당으로 내보내고 수일간의 금식 후 자살시도를 하다가 실패한것을 두고 '쇼'한것 아니냐고 대차게 까내렸거든요.

아무튼 두 인물이 1640년 겨울 청나라 심양으로 잡혀가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김상헌은 호란이후 명나라를 치기위해 조선군을 보내라는 청에게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압송되고, 최명길은 명나라와 몰래 내통하던 사실이 청에게 발각되어 심양으로 가게되죠.

잠깐 동안 심양에 머문것이 아니라 두사람은 약 2년여의 시간을 감빵동기로 생활합니다. 타국에서 2년여의 시간을, 그것도 감옥이라는 곳에서 같이 생활하게 되면 어떤 기분일까요. 정쟁으로 꼴보기싫던 상대에 대한 악의도 누그러지는 시간으로는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두 사람은 어찌되었건 조선의 보국을 생각하는 충신임에는 분명합니다. 감옥 벽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나눈 대화는 김상헌의 '청음집' 그리고 최명길의 '지천집'에 남아있습니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시가 100여개에 달한다하니, 이역만리 타국에서 두 노신이 세웠던 마음의 벽은 허물어진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두 사람이 심양에서 나눈 모든 시에 대해서야 저도 식견이 좁아 다 알지 못합니다만, 연려실기술에 남아있는 문답 두 개는 알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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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최명길이 김상헌에게 보내는 시'

그대 마음 굳은 바위와 같아 흔들림 없음을 알겠거니와,
나의 도는 고리같아서 믿는바에 따라 달라지오
-중략-
일이나 때에 따라 다를지언정
애국의 마음이야 어찌 정도를 벗어나겠소
그대 능히 이 이치를 깨닫는다면
입 밖으로 냄과 침묵 각기 타고난것임을 알아주시겠지요

2. '김상헌이 최명길에게 보내는 답시'

그대의 말 듣고
우리 두 사람의 생각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더니
문득 오랜 오해가 풀리는구려.
성공과 실패는 하늘의 뜻에 달렸어도
나는 섭리로 돌아가는 세상을 보고자하오
-중략-
이치에 밝은 그대에게 부탁하고저
조급하더라도 저울질은 부디 신중하시길바라외다

3. 두 사람의 화해를 본 백강 이경여의 소회(최명길, 김상헌과 함께 심양의 옥에 투옥됨)

두 노신의 의견이 각기 다른 보국의 날개라
한 사람은 하늘을 떠받친 절개요, 한 사람은 시대를 건져낸  공로이지요.
이제서야 두 충신의 생각 합치되었으나,
우리 모두 심양 남쪽에서 백발 늙은이가 되었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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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강 이경여의 구절은 흐르는 세월이 뺏어가는것만 있는것이 아닌것같다는 생각이 들어 좋아합니다. 그래서 넣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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