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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두소녀(4)

'사랑'한다는 그 말

by 가온슬기

부모는 '오늘' '지금' '이 순간'

아이를 이끌고 안심시키고

사랑해야만 한다.

내일이면 너무 늦다.


아이들의 정원(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차창 밖의 자동차 소리

진료실 밖에서 간간히 들리는 사람들의

말소리, 발소리


조용한 정적이 진료실에 깔려있다.

지희는 내내 땅만 보고 있다.


자신의 질문에 답을 하지 않는 지희를

이해한다는 듯 선생님은 말을 이어간다.


"엄마가 지희가 착한 딸이라고 하시더라. 엄마를 많이 도와준다고.

동생들도 많이 도와준다며."


의사 선생님의 잘 다려진 스커트와 살색 스타킹

그 밑의 구두가 햇살을 받아 반짝인다.


"그리고.. 지희가 공부를 잘 한다고 하시던데?"


의사 선생님의 깨끗하고 하얀 손가락

길고 단정한 손톱

반짝이는 시계

"엄마는 지희를 자랑스러워하셔. 책도 많이 읽고 공부도 잘 한다고"


의사가운에 적힌 선생님의 이름

정신과 전문의 정희서

포켓에 단정하게 꽂힌 펜 두 개가

지희의 눈에 들어온다.


"엄마는 지희를 사랑하셔. 선생님이랑 상담하면서

엄마가 지희 얘기 많이 하셨어."


지희는 서서히 눈을 들어 그제야 의사선생님의 얼굴을 본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눈물이 고인 눈으로 의사 선생님을 힙겹게 쳐다본다.

의사선생님은 다시 한 번 이야기한다.


"엄마는 지희를 사랑하신대"


지희는 자신의 귀를 의심한다.


'사랑'

그래 사랑

자신의 엄마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던 그 말을

의사선생님을 통해서 듣는다.


지희의 어깨가 들썩인다.

지희 머리 위 호두껍질이 균열을 일으켜 갈라졌다.

어디서부터 나왔을지 모를 만큼의 울음이

밖으로 쏟아져나왔다.


어릴 적 고모네에 맡겨져있다 돌아왔을 때

엄마는 미용실에서 손님을 하고 있었다.


지희가 미용실에 첫 발을 들여놓았을 대

엄마는 "어 왔구나."가 첫 마디였다.


어린 마음에

미워해보고

그리워하고

다시 사랑하고


수도없이 그리워한 엄마의 첫마디는

지희의 예상밖의 말이었다.


그토록 지희가 갈구하던 그 한마디가

엄마에게 직접 들을 수는 없었어도

타인의 입술에서 '사랑'이라는 그 말이

지희의 마음 속에서 흔들리고 엎어질 것 같았던

슬픔과 사랑의 그 희귀한 조합의

마음속의 그릇을 뚜껑을 닫아 잠재웠다.


상담을 마치고 2호선 전철 속 엄마와 지희


지희의 손에 얹어지는 엄마의 손


엄마는 지희가 묻지도 않았던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한다.

"엄마가 서울 이 멀리까지 와서 상담 받는 건

엄마가 상담받는다고 하면..

혹시나 아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어서

너희 손가락질할까봐..
너희 앞길 막을까봐.. "


시장 속 어느 구석

힘겹게 살아가던 한 여자였던 세 아이의 엄마가

딸아이의 앞길을 막을까봐

먼 길 왕복 3시간을 걸려

자신의 마음의 아픔을 치유해가고 있었던 거였다.


그렇게 인천으로 시장속으로 돌아가는 길

그 긴 시간을 엄마 옆에 앉아

지희는 집으로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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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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