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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두소녀

호두소녀의 슬픔

by 가온슬기

“난 그저 어떠한 경고도 없이 누가 내 세계를 건드리는 게 싫은거야…….그걸 말로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다시 말해서 집에 오면 그 세계에 돌아오는 기분이고, 메이콤을 떠나면 그 세계를 떠나는 것 같아. 웃기지.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모르겠어….“


파수꾼 (하퍼 리) 중에서



외가 식구들이 다 모였다.

외할머니 기일을 추모한다고 모였지만

정작의 이유는 빨리 그 예배를 마치고

아빠들끼리 벌이는 그 술판이었다.


정갈하게 한복을 입고 쪽머리를 한

외할머니의 흑백사진을 뒤로하고

이모가 연안부두에 가서 떠온 회를

중심으로 음식들이 차려진다.


용현동 방 두 칸 짜리 작은 빌라

안방에 긴 상 두 개를 붙여 놓고

온 친척들이 둘러앉는다.


광어회, 벤댕이회, 해물탕 한 상

갖가지 나물 무침

아이들도 한입 가득 상추에 쌈을 싸먹는다.


회와 술 그리고 목소리가 커지면서

모임은 활기를 더해 나간다.


젓가락을 두들기며

흥에 겹다.

노래를 불러제끼고

어깨를 두드리고

다 큰 조카들 손에

천 원 몇 개를 쥐어주는 어른들


이 시끄럽고도 고조된 분위기와 달리

회를 몇 점 먹고 옆방으로 향하는 지희


지희가 이모네에 놀러가고 싶어하는 이유는

언니들의 방.

조용히 언니들의 책장을 바라본다.


고등학생인 사촌언니들의 방은

두 언니의 책상에 올려진 문제집들과

공책 그리고 여러 책들이 쌓여있는

약간은 무질서하면서도 질서있는 방이다.


언니들의 감성 세계의 속살을 엿보는

그 시간이 지희를

상상의 세계로

지희를 데려다주었기에

지희는 늘 이모네를 놀러가는 걸 좋아했다.


안방에서 다같이 술을 마시던

이모부들, 이모들, 큰 이모네 언니들,

형부들이 모인 자리


왁자지껄하게 웃던 그들의 소음이

갑작스럽게 잦아들었다.


왠일인지 지희에게 시선이 닿았는지

언니가 지희의 외모를 지적했다.


“ 쟤 머리가 왜 저래?”

“ 쟤 머리 호두같다.”

“와하하하..”


미용실 일로 바쁜 지희의 엄마는

지희의 머리를 상고머리로 잘라버렸고

중학생이 되어서도 제 머리 매무새를 잘

못 만지던 지희의 더벅머리 스타일이

술을 마시던 누군가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다.


화장실을 가던 지희에게 갑자기 날벼락이 날아왔다.


너무 조용하고 너무 부끄러움이 많은 지희에게

갑자기 날아든 날벼락은

지희의 어린 가슴을 파고들었고

지희는 황급히 엄마 아빠를 돌아보았지만

엄마와 아빠도 지희를 향해 웃고만 있었다.


화장실 거울을 보았다.

지희의 새하얀 얼굴 위에

짧은 머리는 지희의 눈 속에서도

이미 거칠거칠한 호두껍질로 보였다.


싫어서 방으로 , 언니들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방 두 개짜리 빌라에서 지희가 문을 잠그니

다른 아이들이 들어갈 곳이 없었다.


어른들이 타이르는 소리

별 것도 아닌 것으로 삐진다는 소리들

엄마의 꾸중들


타격을 받은 건 지희지만

그게 아무 것도 아닌것처럼

별 타격이 없었다고

그렇게 나와야했다.


그래야 착한 아이고 그래야 지희답다고

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지희가 겸연쩍어 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면서 나올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 방 때문이었다.


언니들의 방,

그 공간을 잃어버릴까 하는 두려움때문이었다.


그 공간은 언니들의 것이었지만

지희의 마음 속에서는 지희만의 공간이기도 했다.


원수연, 신일숙, 이미라의 만화를 좋아한

그녀들의 방에 있었던 쌓여있는 만화책들과 잡지


가수들의 포스터와 음반들

언니들의 생기있는 모습들과

음악을 들으며 이야기하고 좋아하는 그 모습이

지희에게는 모델링과 같았다.


좋아하는 음악에 돈을 쓰고

하얀색 교복을 입고 버스를 타며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언니들의 모습은


이렇다할 관계가 없는

지희의 확장된 세계였다.


호두소녀가 된 지희의 상처받은 마음은

서서히 곪아갔고

지희는 여전히 언니들의 방을 들락날락할 수 있었지만 더이상은 지희로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싫어하는

호두소녀로 변해갔다.


딱딱한 호두 껍질 속에

자신만의 마음을 집어넣어

영영 아무도 모르게 숨어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그렇게 남들이 만들어 준 호두 껍질 속

어두운 세계로 서서히 들어가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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