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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람 Apr 07. 2019

어떤 커리어 우먼이 되고 싶으세요?

'-ess/-ette' 접미사를 뗀 그냥 사람

여자이기 전에 사람입니다만


 다행히 내 주변에는 특정 성 역할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없다. '딸은 이래야지' '여자는 이래야지'가 아니라 '너는 이런 성격이니까' '너는 이런 걸 좋아하니까 이렇게 하는 게 좋지 않겠니?' 이런 식이다. 살찐다고 먹지 말라는 사람도 없었고, 여자다운 직업을 가지라는 사람도, 여자니까 결혼해서 애 낳고 집에 있으라는 사람도 없었다. 참 감사한 일이다.


본격 생존 요리. 딸기잼&감자 샐러드를 바른 모닝빵과 4 등분한 사과.


 같이 사는 외할머니도 사과 껍질 못 깎아 4 등분 해 먹는 나에게 여자가 사과 못 깎아서 쓰냐.’ 대신 ‘혼자 5년씩이나 살다 온 사람이 이거 하냐 못 하냐.’라고 말씀하셔서 내심 기뻤다.






진짜 센 언니는 아이라인이 짙은 언니가 아니었다


 화장을 시작한 건 스무 살이 되고 나서다. 누군가에게 예뻐 보이고 싶어서 시작했다기 보단 자기 방어 차원에서 아이라인을 그리고 립스틱을 발랐다. 내 키 150 초반, 어려 보이는 외모와 가느다란 목소리 탓에 고등학생 때 중학생 소리를 듣고 면접 정장 사러 가서 새내기 소리를 들었다. 남들은 좋은 거 아니냐고 하는데, 글쎄? 돌려 말하면 사회의 때가 안 묻어 보인다는 뜻이라 달갑지만은 않다. 조금이라도 나이 들어 보이려고 매일 아침 전쟁터에 나갈 준비하는 기분으로 화장에 집중했다.


 어려 보인다고, 키가 작다고, 그리고 여자라고 무시받지 않기 위해 진한 화장을 하고 억지로 ‘여자다운 것’ (옅은 화장, 아기자기한 거, 따뜻한 색상, 꽃무늬 등)을 피해 ‘남자다운 것’ ‘중성적인 것’을 쫓아다닌 때가 있었다. 세 보이는 방식으로 화장을 선택한 나는 코르셋에서 해방되지 않았었다. 그때는 그게 탈코르셋이고 성적 역할에서 자유로워지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스스로 ‘약해 보이는 것 = 여자다운 것’이라 정의 내리고 그 반대의 것을 찾아 헤매며 ‘나는 강하다’라고 자기 세뇌를 하고 있던 거였다. 외적으로는 ‘여자다운 것’의 굴레를 벗어난 척할 수는 있었지만 마음속에서는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진짜 강한 힘은 짙은 아이라인, 무채색의 옷, 투박한 핸드폰 케이스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마음가짐에서 우러난다는 것을 깨달은 뒤로는 내가 뭘 입고 뭘 바르는지 덜 신경 쓴다. 보라색이 끌리면 보라색 와이셔츠를 입고, 검은색 수첩이 멋져 보이면 검은색 수첩을 사고. 그냥 그렇게 마음 가는 대로 편하게 산다.


 최근 들어 눈꼬리 부분이 자주 아프다. 피부가 약해진 탓일까. 자꾸 눈물이 번져서 화장을 해도 먹질 않아서 아이라인 그리는 건 포기하고 다니는데 사람들이 나를 제 나이로 봐줘서 놀랐다. 일 하면서 얼굴이 삭아서 그런가…. 이제는 외적인 것에 연연하지 않고 내 마음가짐, 언행, 말투로 나는 강하다는 걸 증명해야겠다.






그놈의 이중잣대


 유일하게 코르셋을 강요받았던 곳은 전 직장이었다. 접객 업무를 하지 않는다고는 해도 항공 업계였고, 항공사를 대표하는 얼굴로 공항을 돌아다녀야 했기에 외모뿐만 아니라 언행까지 감시받았다. 유니폼을 입고 승객들이 앉는 의자에 앉지 마라, 기장에게 말대꾸하면 안 된다, 손톱은 투명 or 빨간색으로 칠하고 귀걸이는 진주 귀걸이만 된다나 뭐라나. 나야 운항 관리 부서라 덜 했지만 여객 서비스 부서 언니들을 보면 장난이 아니었다. 어피(appearance의 약자. 외모) 불량으로 경고를 먹는 건 일상다반사였고, 조금이라도 화려하게 하고 다니면 한 소리 들어야 했다. 심지어 나도 특정 항공사 게이트에 갈 때는 스카프를 넥타이 형태가 아닌 리본 형태로 예쁘게 맨 뒤 머리는 틀어 올려 묶어야 했다.


 입사 초반, 평소대로 자기 방어 화장을 하고 게이트에 가던 중이었다. 내가 한국인인 줄 모르는 한국인 관광객이 나를 가리키며 이렇게 얘기했다.



 야, 저 여자 눈두덩이 x나 벌겋다. 가부키 화장인 줄.
 냅둬라. 저게 일본인들 화장인가 보지.



 회사 유니폼만 안 입고 있었으면 한바탕 하고 남았겠지만 근무 중이니 꾹 참았다. 나중에 우리 집에서 여자 동기들끼리 한 잔 하면서 이 얘기를 하니 다들 비슷한 경험이 있단다. 화장 지적, 머리 지적, 손톱 지적, 안 받은 지적이 없단다. 잔머리가 나와도, 제복에 주름이 가도, 손톱이 더러워도 뭐라 지적받는 건 여자들뿐이었다. 남자들은 안경을 쓰든 수염을 기르든 딱히 상관없었다. 옷이라도 내가 좋아하는 거 입어야 출근할 맛이 나서 꾸미고 다녔던 것뿐인데 너무 화려하다는 둥, 옷이 짧다는 둥 지적받는 날도 많았다. 꾸미는 걸 좋아하는 내가 회사에서 만든 가이드라인대로 꾸미려니 이때 처음으로 꾸미기가 노동으로 다가왔다.


립스틱이라도 비싼 걸 바르면 기분이 나아질까 싶어서 나에게 주는 생일선물로 입생 로랑 틴트를 사봤다. 05.JUN.18


 남자들은 출근 시간 10분 전에 와서 1분 만에 옷 갈아입고 나가는 반면 우리 여자들은 시간 넉넉하게 잡고 도착해서 머리 말아 올리고, 신발 냄새 제거제 뿌리고, 앞머리 고데기하고, 스타킹 올 안 나갔나 확인하고, 립스틱을 바르고 나갔다. 품위 유지비를 더 주는 것도 아닌데 외부 압력에 의해 그러고 다녔다. 이게 다 여자라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니 화가 난다. 여자가 외모 지적받는 건 당연하고, 사람이 외모 지적받는 건 인격 모독이 된다니. 그놈의 이중잣대는 언제 사라지려나.






'-ess/-ette' 접미사를 뗀 그냥 사람


 지금까지 많은 면접을 봤지만, 면접관의 8할은 남자였다. 나머지 2할의 여성 면접관 중 한 분이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다.


 10년 뒤 어떤 커리어 우먼이 되고 싶으세요?


 소신껏 1년 차-5년 차-10년 차의 목표를 얘기하고 덧붙여 종래의 여성의 역할에 억압받지 않고 직장에서나 집에서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분께서는 멋있다고 칭찬해주시고 나를 떨어뜨리셨다. 여자만 4명인 그룹 면접이었는데 나를 뺀 나머지 지원자들은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여자가 되고 싶다고 대답했다.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지만 그게 그들의 행복이라면 막지 않으리. 그냥 ‘아, 그런가 보다.’ 했다.


 그분의 질문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입사 후 포부를 돌려 물은 것일까 아니면 어떤 젠더 관념을 갖고 있는지 알고 싶으셨던 걸까. 정답이 뭐였는지 아직까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 또래 동성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결혼과 육아를 성공한 커리어 우먼의 역할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유튜브로 메릴 스트립의 연설을 볼 때마다 그녀의 워딩에 감동한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칭할 때 여배우(actress)란 말 대신 배우(actor)란 단어를 쓴다. 이런 거에 감동받는 현실이 슬프지만 영향력 있는 사람이 공식 석상에서 중립적인 언어를 쓴다는 것은 좋은 울림을 준다. 매 연설마다 변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주고, 자신의 다른 절반인 ‘윌킨슨’ (어머니의 성)을 언급하는 메릴 스트립의 모습은 우아하기 그지없다. (2017 골든 글로브 수상소감과 2014 아이콘 어워즈 수상소감 들어보는 걸 추천드린다.)


2017 골든 글로브 수상 연설 중인 메릴 스트립. "부서진 마음을 추스르고 예술로 승화시키세요."


 메릴 스트립이 여배우가 아닌 배우이듯이 나도 커리어 우먼 말고 커리어 쌓는 사람이 되고 싶다. 결혼, 육아, 살림과 일을 동시에 해내야만 성공한 커리어 우먼이라는 이미지는 사회가 세뇌시킨 거다. 하고 싶은 일은 많고 결혼은 하기 싫고…. 이렇게 산다고 해서 내가 실패한 커리어 우먼이 되는 것도, 실패한 인생을 사는 것도 아니다. 성공과 실패의 기준은 내면에서 우러나는 것! 부디 우리 모두 사회가 만들어낸 성 관념으로 하나뿐인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가르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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