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끓인 죽

아빠의 언어

by 글 쓰는 사람

"내가 이번에 신세를 참 많이 졌다. "


아빠의 전화였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혼자 있는 오전 시간이었다. 양손에 낀 고무장갑을 벗어서 싱크대에 올려두고 받은 전화에서 건너온 '신세'라는 말이, 나의 평범하고 평온한 시간을 낯설게 했다. 당황해서 말이 잘 나오질 않았다. 아, 아니, 어, 저기... 내 말들이 헤매는 동안 아빠의 말이 이어졌다.


"이 신세는 내가 잊지 않으마. 앞으로 내가 다 갚아 나갈 거니까, 두고 봐라."

거래처 사장에게 업무상 중요한 말을 하는 것처럼 진지한 목소리였다. 아빠가 전화를 잘못 거셨나 싶어 나는 내가 당신의 막내딸임을 상기시켜드렸다. 그럼, 뭔가 다른 말이 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신세라니, 무슨 신세요?"


내가 반문을 해도 아빠는 입에 담은 '신세'라는 단어를 버리지 않았다. 계속 같은 말을 하면서 매번 처음 말하는 것처럼, 아빠는 계속 '신세' 타령을 이어 갔다.


"이번에 진 신세는 잊지 않고 꼭 갚으마."


점점 진해지는 비장함에 아빠의 목소리가 한껏 무거워졌다. 그 무거움 때문인지, 비장한 다짐을 전하는 목표에 몰두한 탓인지 아빠는 내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어떤 대답을 기대하셨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네." 답하자 대화는 끝났고 전화도 끊겼다.


벗었던 고무장갑을 들어 올렸지만 손에 끼지 않았다. 식탁 의자에 앉아 핸드폰 최근 통화 기록에 남은 '아부지' 세 글자를 읽었다.



2주 전, 아빠의 수술이 있었다. 두 달 전에 받은 건강검진에서 위암이 의심된다고 했고 이후 외래진료에서 위암 판정을 받았다. 더 큰 병원으로 전원 했고 운 좋게 바로 외래진료를 받고 수술 날짜를 잡을 수 있었다. 작은 언니 회사에서 부모 건강검진 혜택을 준다고 해서 한 건강검진이었고, 내가 인터넷에 '위암 명의'를 검색해 찾은 큰 병원이었다.

아빠가 위암 판정을 받던 날, 구미에 사는 큰 언니는 새벽 기차를 타고 올라왔다. 병원 근처 직장에 다니는 작은 언니는 점심식사를 포기하고 병원에 왔다. 나도, 엄마도 당연하다는 듯 함께 했다. 아빠 이름이 불리고 아빠가 진료실로 들어갈 때 우리 모두 줄줄이 따라 들어갔다. 의자에 앉은 아빠 주변으로 심각한 얼굴을 한 엄마와 큰 언니, 작은 언니, 내가 서 있었다. 의사의 설명은 5분도 안 되어 끝났다. 위암이고 빠른 시일 내에 수술이 필요하다고 했다. 진료실 문을 열고 나가는 아빠 뒤로 엄마와 큰 언니, 작은 언니, 내가 줄 지어 따라붙었다. 병원 대기실에 앉은 환자들이 우리를 쳐다봤다. 아빠는 머쓱한 지 나 혼자 들으면 되는데, 뭐하러들 왔냐고 했지만 아빠가 기억하는 의사의 말은 우리가 들은 것과 많이 달랐다. 분명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의사에게 들은 말인데, 달랐다. 아빠는 의사의 말을 온전하게 받아들이지도 않은 것 같았다. 일흔이 넘어서도 회사의 중요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내가 잘 아는 아빠와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런 아빠가 몹시 낯설었다.

병원 진료 대기실 의자에 앉은 아빠를 보면서, 새삼스럽게 아빠의 나이를 계산해봤다. 일흔다섯, 적지 않은 나이였다.

그날 병원에서 나는, 내겐 늘 크고 건장한 어른이었던 아빠가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난 것 같았다.


전원 한 병원은 집에서 30~40분 거리에 있었다. 첫 진료가 있던 날, 아빠가 운전하는 아빠 차에 엄마와 작은 언니, 내가 탔다. 작은 언니가 운전하는 차로 모시겠다고 했지만 어빠는 '아직 괜찮다', 는 말 한마디로 거절했다. 먼저 병원에서 검사한 각종 기록지를 등록하고 조금 기다린 끝에 담당 의사를 만났다. 아빠 주변으로 엄마와 작은 언니, 내가 앉았다. 담당 의사가 친절하고 다정한 말투로 아빠의 상태를 설명해줬다. 의사의 친절함에 엄마와 작은 언니, 나는 마음을 조금 편히 먹었지만 아빠는 아닌 것 같았다. 큰 잘못을 하고 엄한 선생님 앞에 불려 간 학생처럼 잔뜩 긴장해 있었다. 그때의 아빠도 몹시, 낯설었다.


다시 아빠가 운전하는 차에 엄마와 작은 언니와 내가 탔고 병원을 나와 집으로 향했다. 길가에 노란 은행나무가 오래 이어지자 엄마는 단풍 구경을 나온 사람처럼 은행나무들을 보며 연신 감탄했다.

"당신 덕분에 애들 데리고 단풍 구경도 하고 좋네."

엄마의 매운 농담에 무슨 말로 답을 해야 할지 몰라, 뒷좌석에 함께 앉은 작은 언니와도 시선을 맞추지 못했다. 그때 아빠가 말했다.

"이 차에 너희들 태우고 어디 가는 거, 참 오랜만이다. 예전에는 참 많이 태우고 다녔는데 말이다."

언니들과 살 비비며 자동차 뒷좌석을 꽉 채우고 앉았던, 까마득한 옛날 기억이 엄습해 대답 대신 눈물이 차올랐다. 나는 노란 은행나무가, 빨갛게 물든 단풍나무가 저 멀리 붉게 물든 산이 참 예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렇게 2주 후, 아빠는 수술을 받았다. 입원 기간은 5일. 입원 기간 동안 병원 생활을 함께 한 엄마가 퇴원 후 음식을 준비하는 건 쉽지 않아 보였다. 뭔가 도움이 될까 싶은 마음에, 위암 수술 환자를 위한 요리 레시피 책을 주문했다. 음식을 담아드릴 유리그릇도 주문했다. 도착한 요리책을 대충 훑어보곤 재료를 골라 요리할 준비를 했다.

고구마를 깍둑썰기해서 불린 쌀과 함께 끓였다. 한참을 끓여 하얀 쌀이 반투명해졌을 때 큰 포크를 꺼내 고구마와 쌀을 으깼다. 마지막으로 체에 곱게 걸러 유리그릇에 담았다. 같은 방법으로 단호박 죽도 끓여 담았다. 한두 그릇 씩 정도의 소량으로 끓였다. 행여 입맛을 잃을까 걱정되어 죽이지만 다양한 종류로 준비하려고 했다. 불린 쌀이 끓어 투명해진 끝에 뭉개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적은 양을 끓이는데도 한두 시간이 금방 갔다. 자정이 넘은 깊은 밤까지 수저를 뒤적이며 죽을 끓였다. 깍둑썰기한 고구마나, 단호박이 형체 없이 사라졌다. 끓은 물로 소독한 유리그릇에 뜨거운 죽을 담았다. 엄마 아빠가 좋아하겠지 생각을 하다, 마흔이 넘어서도 부모의 칭찬을 기대하는 어린 나를 만났다.

다음 날엔 한우 양지를 사다 육수를 냈다. 한우 양지 육수에 불린 쌀을 넣고 끓였다. 깍둑 썬 감자와 애호박을 넣고 바글바글 끓였다. 감자와 애호박이 쉽게 뭉개질 때까지 끓여 포크로 으깼다. 불린 쌀과 감자, 애호박을 믹서에 갈 수도 있었지만 '영양소 파괴'와 같이 믹서기에 대한 안 좋은 말이 귀에 박혀 쉬운 방법을 택할 수가 없었다. 흑임자 죽은 흑임자를 절구에 넣고 나무 방망이를 이용해 으깼다. 흑임자가 내 손의 힘에 눌려 터지고 으깨지면서 고소한 냄새가 주방에 그득 찼다. 불린 쌀에 곱게 빻은 흑임자를 넣고 끓였다. 쌀알이 끓어 곤죽이 될 때까지 수저로 젓고 저었다. 그러다 죽이 걸죽해지면 물을 붓고 수저로 뒤적이며 끓였다. 바닥에 들러붙지 않도록 힘주어 젓고 또 저었다. 아빠 입맛에 안 맞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달고 수저를 뒤적이기도 했다. 지방이 없는 돼지고기 안심 살도 사서 삶았다. 장조림 할 때보다는 싱거운 간장 양념을 만들었다. 간장 양념에 돼지고기 안심을 덩어리로 잘라 넣고 끓였다. 잘 조려진 고기를 얇은 편으로 썰어 그릇에 담았다.


아빠가 말하는 신세란, 대충 이런 거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병원에 함께 간 것, 진료 예약을 잡은 것, 죽을 끓인 것. 마흔 살 넘은 내게 쏟은 아버지의 사랑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것임에도, 아빠는 그것을 딸에게 진 '신세'라 하고 곧 갚아야 할 것이라 했다. 아빠를 향한 우리의 사랑이, 아빠는 많이 낯설고 어색한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부녀지간인데 아빠 말이 너무...라는 생각이 자꾸 따라붙었다. 그러다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렀다.

고맙다는 말이나 사랑한다는 말을 가지지 못해 '신세 갚겠다'고 말하는 가난한 아빠의 언어 때문에, 아빠의 언어가 열심히 살아온 날들과 달리 너무 가난해서,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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