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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다움 Nov 02. 2023

13년 만에 엄마와 합가 ‘너랑 같이 못살겠다’

엄마의 치매 유발자

 2년 전 아빠가 돌아가셨다. 갑자기 몸이 안 좋아지며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이별을 맞이했다. 아빠는 원래 몸이 건강하지는 않으셨는데, 정말 갑자기 일주일 사이에 극도로 안 좋아졌다. 특별한 증상이 있는 게 아니어서 식사량이 줄어들고, 기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라 요양병원을 예약해두었다.      

그때는 연휴라 온종일 아빠와 시간을 보냈다. 아빠는 늘 내가 집에 가면 맨발로 문을 열어주고, 돌아갈 때 역시 맨발로 현관 앞에 서서 엘리베이터에 탈 때까지 지켜보곤 했다. 그런 아빠가 나를 쳐다보지도 못할 만큼 쇠약해져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속상하면서도, 병원에 안 가겠다고 고집부리며 엄마를 고생시키는 아빠가 미워 짜증을 냈다.      


그날이 살아있는 아빠를 볼 수 있는, 아빠를 만질 수 있는, 아빠와 말을 할 수 있는 마지막 날이라는 걸 알았다면 안 그랬을 텐데…. 살아내느라 고생했다고, 애썼다고, 아빠가 내 아빠여서 정말 고마웠다고, 사랑한다고 말해줬을 텐데…. 미래를 알지 못했던 우둔한 나는 짜증만 냈다. 집에 돌아올 때는 아빠가 주무시는 것 같아 깨우지 않으려고 얼굴 한 번 안 보고 돌아왔다.

      


사람은 왜 항상 지나고 후회할까. “있을 때 잘해. 후회하지 말고~”라는 유행가처럼 있을 때 잘하면 얼마나 좋을까. 떠난 사람도, 남겨진 사람도 후회로 남는 흔적들이 너무 아프다.     


인생에서 가장 슬픈 세 가지
할 수 있었는데, 해야 했는데, 해야만 했는데. 
-루이스 분-  

        


 

다음 날 출근해서 업무 정리를 하는데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아빠가 숨을 안 쉰다. 119에 전화 좀 해라.” 엄마의 목소리는 곧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119에 신고하고 급하게 출발했다. 아침 출근길이라 차량 정체가 심했다. 눈물이 앞을 가려 운전을 할 수 없었지만, 멈출 수도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확성기를 들고 ‘우리 아빠가 숨을 안 쉰대요. 빨리 가야 해요, 길 좀 비켜주세요!’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아빠가 옮겨진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었다. 주먹 쥐고 있던 손에 쥐가 날 때쯤 의사가 다가왔다. 


                                                   “사망하셨습니다.” 


엄마의 통곡 소리를 들으며 이미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주먹만 더 세게 말아쥐었다. 

그렇게 엄마와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별을 했다.      


아빠를 보내고 두 달쯤 되어가던 12월 말, 연말이라 너무 바빠 1주일 동안 엄마를 찾아보지 못했다. 매일 전화라도 하며 안부를 확인했는데, 그날은 그럴 정신도 없었다. 토요일임에도 밤 10시가 넘어 퇴근하며 지쳐있던 나에게 엄마가 전화했다. 

전화를 받자마자 다짜고짜 

“이 *년! 너는 제 어미가 죽든 말든 관심도 없는 독한 년이야! 싸가지없는 년. 내가 죽거든 찾아와라 강아지 같은 년아!” 

뚝 끊긴 전화.  “........” 

무슨 상황인지 파악도 안 되며 밀려오는 당혹감...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화도 나고,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 온몸이 바르르 떨렸다.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아 엄마 집으로 찾아갔다.      

안부 전화를 안 해서 화가 났다는 것은 핑계였다. 엄마가 화가 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들어온 조의금 현황을 자신에게 알려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한 번 기가 막혔다. 장례가 끝나고 다음 날 엑셀표로 정리해서 보여주고, 각자 인사드려야 하는 분들까지 같이 확인하고 연락까지 했는데 못 봤단다. 남편까지 나서서 거들고, 엄마가 직접 표시한 종이를 보여주자 그제야 슬쩍 꼬리를 내린다.


 그때는 아빠를 보내고 난 직후라 너무 경황이 없어서, 슬퍼서 엄마의 기억에서 지워졌나보다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전조 증상이었다. 엄마가 기억을 놓기 시작한... 아마 이때부터 엄마의 뇌는 조금씩 망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아빠를 보내고 엄마는 아빠와 30년을 살았던 집에 혼자 살았다. 그렇게 1년이 되어가던 가을쯤, 엄마는 ‘밤이면 집에 누가 들어오는 것 같아 무서워서 잠을 못 자겠어.’라며 불안함을 호소했다. 엄마는 불안증과 우울증을 앓게 됐고, 살아생전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해 준 적 없는 아빠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에 고통스러워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온 집안의 가전, 가구를 새로 바꿨다. 아빠가 연상되는 물건들은 다 바꾸고 싶다는 엄마의 강력한 주장 때문이었다. 가끔 찾아가는 나도 거실 쇼파에 앉아 있는 아빠, 안방에 누워있는 아빠, 현관에서 손 흔들며 배웅해주는 아빠가 계속 눈에 보였다. 하물며 30년을 매일 아빠와 함께했던 엄마는 오죽했을까.  


 연구결과에 따르면, 우울증이 있는 노인은 우울증이 없는 노인보다 치매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노인우울증의 특징으로 40~60%는 인지기능 저하가 동반돼 치매발생 위험을 높인다고 한다.

  

 그렇게, 무척 추웠던 12월 첫째 주 토요일부터 엄마는 우리 집에서 함께 살게 됐다. 

함께 산 지 딱 일주일 되던 금요일, 회의에 참여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는 중에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난 너랑 더는 같이 못 살겠다. 너 같은 년이랑은 살 수가 없어! 옷가방만 챙겨서 나갈 거니까 그렇게 알아!!” 고성을 지르며 전화는 끊겼다. 


회의고 뭐고 집으로 달려갔다. 엄마는 나를 보자 울면서 너무 힘들다고 했다. 얹혀사는 것도 힘들고, 내 맘대로 씻지도 못하고, 옷도 편하게 입고 있을수도 없는 게 너무 힘들다고 했다. 

나는 엄마를 우리 집에 모셔다 놓으면 내 할일이 끝나는 줄 알았다. 엄마의 마음까지 살펴야 했는데 그러기엔 

내가 너무 그릇이 작았다. 

엄마를 안아주며 미안하다고 했다. 나도 엄마랑 떨어져 산 지 너무 오래돼서 맞춰갈 시간이 필요하니까 엄마가 불편해도 이해해달라고 부탁했다. 침대에 걸터앉아 벽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는 엄마를 보며 죄스러운 마음이 가득했다.     

 

 그랬다. 나의 영역에 엄마라는 이방인이 들어온 게 싫었다. 10년 동안 내가, 우리 가족이 만들어 온 규칙과 생활 패턴이 달라지는 게 싫었다. 나는 엄마를 이방인으로 대했고, 나의 규칙에 맞추도록 강요했다. 생활환경이 달라진 엄마의 불안감을 무시했고, 살피지 않았다. 내 것이 무너지는 게 싫어 엄마를 무너뜨렸다. 엄마의 손발을 묶었고,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그 때를 후회한다. 지금은 잘 지내지만, 그때 받은 스트레스가 엄마의 기억 소실에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닌지 두렵다.      


 사람은 왜 지나고 후회하는가. 

어쩌면 현재의 행동이 불러올 미래의 결과를 어느 정도 예측하면서도 모르는 체하고 있는 건 아닌가?


 사람은 왜 후회하고 또 실수하는가.

 망각의 동물이라 그런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건가.     


지금을 기억하지 않으면 내일 또 실수하고 후회할 게 뻔하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기록하기로 했다. 

기억하고, 기억하고, 또 기억하여 후회를 줄일 수 있다면 다가오는 이별 앞에서 덜 슬플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엄마를 기록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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