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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화 Nov 09. 2019

가족을 묻지 마세요

친구들이 우리 가족 상황을 아는 것이 죽도록 싫었다

학창 시절에 공포스러웠던 시간을 꼽자면 하나는 학기초이다. 신입생이 되면서 친구를 못 사귀지 않을까, 공부가 더 어려워져서 성적이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보다는 선생님이 나눠주는 가정환경조사서를 적어내는 것이 더 힘들었다. 그것도 반 학생들이 다 있는 교실에서 써서 바로 내라고 할 때이다. 고학년이 될수록 문항은 더 많아지고 세세해져서 부모님께 적어달라고 해야 했지만, 저학년일 때는 적는 사항이 간단해서 그 자리에서 바로 쓰게 했다.


집주소, 취미, 특기, 특이사항 등 개인 정보는 술술 적어 내려갔지만 가족사항 칸에서는 선뜻 쓰지 못하고 멈춰있기가 일쑤였다. 부모 칸에서 '아빠'는 썼는데 '엄마'칸을 앞에 두고 복잡해졌다. 엄마는 살아있으니까 쓰는 게 맞는 걸까, 같이 안 사니까 안 쓰는 게 맞는 걸까, 비워두면 빈칸이 눈에 띄어서 우리 부모님이 이혼한 걸 반 친구들이 알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로 괴로웠다.


그럼 일단은 건너뛰고 형제 칸을 채우자. 내 바로 아래 동생은 바로 썼는데, 다음 칸에서 또 멈췄다. 아빠랑 새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동생을 가족으로 써야 할지, 안 써야 할지 또 결정을 해야 한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아빠랑 자식이니까 동생은 맞는데, 한 번도 편하게 지내본 적이 없는데 가족이 맞는 걸까? 가족인지 아닌지 의문이 먼저 들었기에 쉽게 쓸 수가 없었다.


다른 아이들은 금방 적는 것 같은데 나는 왜 이렇게 뜸을 들여야 할까. 이 작은 칸들이 나를 괴롭게 했다. 어찌어찌 다 쓰고 참고 있던 숨을 고르게 쉬자마자, 선생님이 "뒤에서부터 앞으로 걷어 와"하신다. 그럼 또 식은땀이 등 뒤로 흐른다. 이 방식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한 가지는 맨 뒤에 앉은 학생이 앞에서부터 오면서 걷는 경우가 있고, 두 번째는 맨뒤에서부터 앞자리로 종이를 넘기면 차곡차곡 쌓아진 종이를 맨 앞자리 친구가 선생님께 주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그 두 방법 모두 다 나는 힘들었다. 어느 방식이던 다른 친구들이 내 가정환경조사서를 본다는 것이다. 

그냥 한 사람씩 가서 선생님께 내면 안 되는 걸까?
 아니면 이런 거 안 써내면 안 되는 걸까?
이 시간이 너무 싫었고,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친구들이 우리 가족 상황을 아는 것이 죽도록 싫었다. 친구들 입에서 "쟤네 부모님 이혼했대. 쟤 엄마랑 안 산대" 그 비슷한 말들이 나오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것은 나에게는 낙인이었다. 정상적이지 않은 가정환경에서 자란 아이라는 낙인. 그 낙인이 나에게 써질까 봐 난 늘 긴장해야 했고, 친구들 앞에서 머리를 굴려가며 집 이야기를 해야 했다. 때로는 상황을 무마시키기 위해서 작은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거짓말을 할 때면 그게 또 나를 무겁게 했다.


한 번은 친구들이랑 주말에 하루 종일 학교에서 시험공부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그 날 친구 중 한 명이 큰 통에 잡채를 한가득 싸왔다. 그 친구는 늘 시험기간이면 맛있는 것을 싸왔다. 엄마가 공부한다고 밥 사 먹지 말고 친구들하고 나눠먹으라고 싸줬다는 것이다. 난 그 친구네 잡채가 그렇게 맛있었다. 


우린 같이 나눠 먹었고, 나는 늘 컵라면을 싸가서 친구들과 나눠먹었다. 그때마다 자연스럽게 엄마 이야기가 나왔다. 친구의 잡채가 부러웠던 다른 친구는 "우리 엄마는 내가 해달라고 해도 맨날 까먹어. 귀찮아해. 너네 엄마 정말 부럽다." 라며 툴툴거렸다.


 그 옆에서 나는 아무 말을 안 하고 듣기만 하자
"너는 왜 엄마 이야기 잘 안 해?"라며 나에게 물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심장이 엄청 빨리 뛰기 시작했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혹시 티가 났나. 친구가 눈치를 챈 거는 아닐까. 속은 시끄러웠지만 태연하게 말했다. 어느 날은 "그냥 뭐"하고 얼 머무리기도 했고, 어떤 날은 "우리 엄마 요리 못해서 나는 애초에 해달라고 안 해"라며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 친구는 대충 짐작은 하는 것 같았지만 또 나에게 자세히 묻지 않고 넘어가 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감사하게도 내 옆에는 배려심 있는 친구들이 있었던 것 같다.


성인이 되면 좀 무뎌질까. 전혀 아니었다. 친구들 가족과 끊임없는 비교와 박탈감은 나의 일상이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가족을 묻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긴장한다. 적당히 거짓말로 넘길 것인지, 아니면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아직도 망설여진다. 20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누군가에는 안부를 묻듯 아주 가벼운 질문일 수도 있는 가족 이야기. 
하지만 누구나에게나 다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낯선 학기초 학교에서 가정환경조사서를 써야 할 때도,

부모님이 싸준 간식을 가져온 친구가 나에게 부모님을 물어볼 때도,

나에게 좀 더 배려해주면 안 되는 것인지 세상을 탓하기도 했다


하지만 의문이 든다.

약간의 배려는 세상은 해줄 수 있어도,

나를 상처하나 없게 만드는 배려를 세상은 할 수 있나.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결국 나에게 주어진 이 삶을 상처 받으며 나 스스로 이겨내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에게 가족을 묻지 마세요.

그게 저에게 주는 작은 배려입니다.





  ***   부모님이 이혼하던 6살 때부터로 돌아가 그동안에 나에게 있었던 일들을, 슬픔들을, 원망들을, 그리움들을 꺼내는 글을 쓰고 있습니다. 말로 하지 못했던 말들을 글로나마 풀어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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