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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이 사랑

슬픔을 나누며 사랑으로 치유된다

by 이가연

슬픈 얘기 들으면 슬픈 사람이 두 명 되니까 나쁜 거 아니다.

'내가 이렇게 가치 있는 사람이구나. 이렇게나 중요한 사람이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나한테 왜 이런 말을 하지? 내가 무슨 감정 쓰레기통인가.'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마음이 되게 아픈 사람이다.

과거에 나는, 아니 그냥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화가 났다. '나는 뭐 아무한테나 진지하고 진심 어린 말을 하는 줄 아나.' 그게 얼마나 귀했던 건 줄 모르고 서서히 피했든, 내가 분노해서 도망갔든 가버린 사람들에게 화가 났다. 그래서 오빠가 수십 번이고 '너가 이렇게 매번 공유해 줘서 고맙다. 나도 배우는 점이 많다. 카톡 쭉 읽으면서 흐뭇하다.' 이런 말을 들어야 치유가 조금씩 됐었다. 똑같은 유형의 상처를 받은 게 한두 명이 아니라 수십 명이라서, 이 오빠 한 명이 일당백으로 치료해 줬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오빠는 건강한 사람이고, 나머지 사람들이 불건강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내 잘못이 아니었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고맙다. 작년 초반을 생각하면, 오빠가 '그렇게 사람에 대한 상처가 깊은데 나를 뭘 믿고 이렇게 말해주니 고맙다'는 말도 많이 했다.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타로 채널 때문이다. 사람들의 진심 어린 댓글을 보면서 치유받는다. '나를 뭘 믿고 저렇게 진심 어린 댓글을 써줄까.'싶어서 아름답다. 오빠가 했던 말이 또 떠오른다. ADHD인들의 필터 없이 조잘조잘 막 얘기하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지 나도 그렇고, ADHD 학생들에게도 그렇고 말해준다고 한다.

누군가는 그런 슬픈 사연 댓글들을 보면 나도 슬퍼지는 거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오히려 내가 한마디 해줄 수 있어서 흐뭇한 마음이 든다. 얼마 전 구하라 납골당에 다녀온 것과 마찬가지다. '왜 죽었어! 죽지 마!' 하는 것도 아니고 나는 그녀의 죽음을 받아들인 상태이기 때문에,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아야지. 언니 몫까지.'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 장소에 남겨져있는 건 '사랑'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구하라'라는 한 사람에게 전하는 그 사랑이 좋은 향처럼 퍼지는 공간이지, 슬픈 공간이 아니다.

'슬픈 얘기 들으면 슬픈 사람이 두 명 된다'라는 말에 공감하는 사람은, 대문자 T여서가 아니라 마음의 문을 굳건하게 닫고 있는, 아픈 사람이다. '얼마나 주변에 사람이 있어도 인생 혼자 사는 느낌일까' 싶어서 이젠 불쌍하게 느껴진다. 슬픔을 나눈단 건 마음이 건강하다는 증거다.



P.S. 이 말은 그냥 내가 기분이 좋아서 첨부한다. 나이 들어 늦기 전에, 더 살을 빼서 더 닮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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