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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사람이 힘이 듭니다

by 이가연

오늘 에콰도르에서 스페인어 튜터가 서울 온 날이었다. 오후 내내 제대로 약속 시간과 장소를 안 잡고, 시간이 5시에서 6시, 7시 반, 8시가 되도록 계속 미뤄졌다. 나는 '한국에서' 해 떨어지고는 외출할 일이 없다. 올해 공연 때문에 한 번 떠오른다. 해 떨어지기 전에 나가서, 해 떨어지고 집에 돌아오는 건 가능하다. 이미 밤인데 내가 집 밖을 나가게 하기는 매우 어렵다. 어차피 그럴 일도 안 발생한다.


튜터가 1박 2일 일정이라했고, 어쩔 수 없이 나갈 생각으로 오후부터 저녁까지 계속 기다렸다. 그런데 이 친구가 계속 미루자 짜증은 짜증대로 난 상태였다. 머릿 속에 탭이 안 꺼진 상황이니, ADHD인에게 완전 고문이다. 가장 하면 안 되는 짓이다. ADHD 밈 중에서, 오후 5시에 약속이 있으면 일어나서 오후 5시까지 아무 것도 못한다는 짤도 많이 봤다. 일반인에게도 그렇게 약속 시간을 계속 미루면 안 되는데, 나는 바로 두통이 왔다. 바로 신체 통증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정말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닌데, 이미 오고있다하는데도 약속을 취소한다는 말을 보내기 직전이었다. 이미 서울역이라고 했는데도. 정말 보내고싶어 미치는 상황이 되었던 찰나, 서울역이 아니라 사당역이란 말을 해왔다. 1호선을 타야하는데, 4호선 탄 거다. 그래서 그 즉시 '그럼 그 길로 그냥 2호선 타고 홍대 호텔로 돌아가라, 나는 오늘 못 만난다'고 보냈다. 그랬더니 그 친구도 이미 지하철에 지칠대로 지쳤는지 알겠다고 미안하다고했다. (서울 지하철... 영어로 다 방송해주는데 그게 어찌 발생할 일인가. 영국 살 때, 뭘 타든 지금 다음 역이 내가 생각하는 다음 역이 맞는지 확인하는 습관 들였다. 잘못 탔어도 한 정거장 만에 알아야 정상이다.)


이런 상황이 나에게 힘든 이유는, 이 친구만 힘들어서가 아니다. 과거와 현재에 겪고있는 이와 비슷한 모든 게 떠올라서다. 바로 '상대방이 탭을 안 꺼주면 내 뇌에서 일어나는 신체 및 심리적 통증' 때문이다.


나에겐 한국에서는 편하게 언제 시간 되시냐고 물어보고 만날 수 있는 분이 딱 한 분 계셨다. 그런데 이미 한달 반 전부터, 카톡으로 티키타카가 이뤄지지 않았다. 난 이걸 '틱 틱 공감'이라 부르기로 했다. 내가 선톡하면, 그에 대해 상대가 대답하고, 거기에 내가 말을 하면 상대는 공감만 누르고 튀는 거다. 한마디 들으려고 선톡했겠나. 이 얼마나 슬픈가. 그런 '틱틱공감'이 두 번만 발생해도 '제발 하지 말라고' 다짐했거늘. 두 번만 발생해도 이미 기분 나쁘면서, 그 뒤로 내가 하는 건 '억하심정' 아니겠나... '어디 언제까지 그러나 보자'가 무의식에서 발동하는 거 아닐까.


'역시 난 카톡은 트라우마가 있어'하고 인스타로 옮겨갔다. 그러곤 릴스도 보내고, 요즘 바쁘시냐며도 보냈다. 괜찮다. 담배 끊었다고 말한 사람도 어쩌다가 한 번 필 수 있듯이, 나는 이 '사람 중독'을 꽤나 오랜 시간 겪어왔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오픈 채팅, 당근 마켓, 각종 모임 등으로 사람을 찾아 나서는 '사람 중독'은 끊었는데, 이미 아는 사람이 똑바로 대화할 때까지 보내는 것도 참 끊기 힘든 중독이다.


그 상대방 자체가 좋은 게 아닌데, 계속 붙드는 행위다. 이미 나는 상대방이 싫어진 감정 상태란 게 인지가 잘 안 된다. 상대는 나보다 먼저 내가 싫어져서 그런 행동을 보이는 거고, 그 때문에 나도 싫어진 상황 아니냐.


오빠 말고도 그래도 지인들이 있었는데, 그 지인들마저도 가지 치기가 되는 요즘이다. 남들이 1로 느끼는 걸 100으로 느낀다면, 남들이 친구 10명 둘 때 나는 1명만 있어도 힘들지 않을까. 스트레스 안 주는 오빠 한 명에 감사하고 살아야하지 않을까.


분명 최근에 상처 받은 지인은, 인스타고 카톡이고 보내면 깜짝 놀랄 속도로 칼답하던 분이었다. 그랬던 분이 한달 반 전부터 갑자기 연이은 '틱틱공감'과, 인스타는 아예 며칠씩 안 보시니 '의도적인 거리두기'로 생각들만 하다.


하늘..? 9월엔 '한국인만 그런 거 아니다'로 영국인 친구 손절시키더니, 이제는 '40대나 20대나 똑같네'를 알려주시나요. 저도 한국인 아닌 영국인이라고, 또래 아닌 4050대라고 다 좋은 거 아닌 거 다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실습시켜주시면 힘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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