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호르몬과 산전우울증
임신 12주 차, 아직 배가 나오는 시기가 아닌데 벌써 배가 좀 나오는 거 같았다. 평소보다 펑퍼짐한 옷을 찾게 되고 청바지를 입지 않게 되었다. 구두도 신발장 윗켠으로 다 넣었다. 가끔 중요한 일이 있을 때면 편하고 낮은 구두를 신고 평소엔 운동화만 주구장창 신었다. 임신 전엔 매일 5cm 이상의 구두만 고집했는데 임신하니 조심해야 된다는 생각에 저절로 내 일상이 변화되고 있었다.
축복받은 나의 몸은 입덧도 없었다. 덕분에 쉬지 않고 일을 했고, 여전히 바쁘게 다니며 일했다. 얼핏 보면 임산부로 아무도 보지 않았기에 임신 전과 다르지 않게 움직였다. 마음속으론 조심해야지 하면서도 생각과 다르게 하루하루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 임신 전과 같이 활발하게 지속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제일 건강한 임신기간을 보내는 방법이라는 유튜브를 보고선 마음의 위안을 가졌다. 하지만 발바닥이 저릿할 정도로 일하고 집에 돌아와 눕는 날이면 혹여나 뱃속의 아기에게 무리가 되진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내가 힘들고 지치면 그 영향이 아기에게 갈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에 걱정이 휙휙 날아와 마음에 꼳혔다. 물론 다음날 아침이면 또 출근을 해서 전과 같이 일했다. 후회와 망각의 연속이었다.
깜박깜박 건망증도 생겼다. 냉장고 앞에 서서 뭘 가지러 왔는지 잊기도 했고, 금방 손님과 예약 전화를 해놓고 몇 시에 예약 했는지 잊어서 다시 전화 하는 일이 몇 번 반복되었다. 덕분에 통화하며 메모하는 습관이 생겼다. 남편이 부탁한 일을 잊기도 했다. 다툼으로 치닫진 않았지만 남편을 서운하게 했다. 남편은 내가 본인말을 집중해서 듣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되려 건망증을 이해해 주지 못하는 남편에게 서운함을 느꼈다.
일을 쉬지 않고 해서 걱정을 하던 와중에 엎친데 덮친 격이랄까. 이사를 해야 했다. 아기가 태어나게 됐으니 더 넓은 집으로 가자고 몇 달 전부터 했던 계획이였는데 막상 당장 코앞으로 일이 닥치니 걱정이 앞섰다.
포장이사를 했지만 내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릇들을 포장해야 했고 취미로 키우던 어항을 챙겨야 했고 여기저기 짐을 어떻게 배치할지 구상해야 했다. 집이 더 넓어졌기에 새로 들어올 가구와 가전들도 챙겨야 했다. 홀몸으로 해도 피곤한 것들을 또 나는 해냈다. 아니 해내야 했다. 이사에 관련된 서류도 챙겨야 했고, 남편보다 비교적 자유롭게 유동적으로 일을 조절할 수있는 나는 전입신고, 보증보험 등 서류처리와 부수적인 모든 행정활동을 도맡아야 했다. 점점 더 무거워지고 피곤해 지는 몸으로 여기저기 다닌다는게 여간 힘든일이 아니었다.
시어머니는 매일같이 전화를 해서 걱정을 하시곤 하셨다. 임신하고 이사해서 어쩌냐. 도와줄 거 있음 도와주겠다. 필요한 건 없냐, 먹고 싶은 건 없냐. 매번 물으셨다. 감사했다. 다들 시어머니 욕을 하곤 하던데 우리 어머님은 내게 너무 잘해주시고 신경써 주심에 더없이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밤마다 우울감이 생겼다. 혼자 베갯잇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나도 내가 왜 우는지 몰랐다. 그저 서운했고 짜증 났고 눈물이 났다. 그렇다고 매 순간 우울한 기분이 드는 건 아니었다. 자기 전 새벽녘에만 눈물이 차올랐다. 다시 한번 사춘기가 온 건가 싶을 정도로 새벽마다 감성 넘치는 호르몬 덕에 베개는 눈물자국으로 덕지덕지 얼룩이 생겼다. 내 울음을 발견하지 못하고 잠드는 남편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말 하지 않아도 모든걸 알아주길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이 샘솟았다. 임신을 하면 남편이 그렇게 밉다더니 사실이었다. 항상 고맙지만 항상 미운 요상한 감정에 휩싸여 괜한 심술을 부렸다.
조금씩 변화하는 체형과 감정에서 내가 임산부라는 게 느껴졌다. 여전히 바쁘게 아니 어쩌면 임신 전보다 더 바쁘게 일했다. 하지만 지치지 않았다. 아이를 위해 더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 놓고 싶었다. 출산 후 한동안 일하지 못할걸 생각하면 벌써 걱정이 되었다. 현재의 바쁨에 감사했다. 정부 지원금으로 매달 120만 원의 돈이 들어온다고 했다. 그래도 내 걱정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사실 내가 수익이 없어진다고 우리 가정 경제가 무너질 일은 없었다. 남편도 돈을 꽤 잘 벌고 있고 정부지원금도 있으니. 현실을 알고 있지만 불안감에 휩싸여 초조해했다. 괜한 불안감이었다.
자주 감정의 파도에 휩쓸려 오락가락한 기분에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다. 즐겁다가도 불안했고 그러다 또 슬퍼졌다. 산전우울증 같은 건가 싶었다. 요샌 꽤나 심각하게 산전, 산후 우울증을 다룬다고 하던데 나도 설마 그런 건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걱정으로 끝냈다. 걱정을 하고 있을 시간이 아니었다. 더 열심히 움직여야 할 것만 같았다.
흔히들 임신 중 우울감을 두고 임신 호르몬 때문이라고 "호르몬의 노예"라서 그렇다고 말하고는 한다.
나도 그저 "호르몬의 노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