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별테스트, 여름휴가, 새로운 불편함
그간 반지테스트(결혼반지를 머리카락에 끼워 흔들다 멈추면 반지가 흔들리는 모양으로 성별을 구별하는 일종의 미신 테스트), 중국황실달력 (중국에서 유래된? 성별예측 달력), 각도법 (아기 초음파 사진의 척추 각도를 보고 예상하는 방법), 심장소리 예측법 등등 수많은 믿거나 말거나 성별테스트를 해 봤다. 물론 모든 테스트는 각기 다른 답을 내주어 우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남편은 딸을 바랬다. 난 아들을 바랬다. 사실 아들이 되었든 딸이 되었든 크게 상관이 있지는 않았다. 그저 새 생명이 내 뱃속에 꿈틀거리고 있다는 사실에 들떠있었다.
16주, 드디어 성별을 알 수 있다. 평소 보다 일찍 남편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처음 산부인과를 방문했을 때의 떨림과 비슷한 설렘으로 손발에 땀이 났다. 초음파상 돌출부위가 없고 성기 모양이 얼핏 보였기에 우리는 뱃속의 다올이가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딸이라니. '나를 닮은, 남편을 닮은 예쁜 딸이겠지?' 몇 초 안 되는 짧은 순간 딸과 손잡고 데이트하는 상상에 빠졌다. 성별을 알게 되니 더 설레어졌다.
남편은 성별을 알게 되고선 몇 초 동공의 떨림이 있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딸을 바랬지만 막상 딸이라고 하니 '축구나 캐치볼도 못하고 목욕탕도 같이 못 가겠지.'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고 한다.
딸이라고 공놀이하지 말란 법이 있나? 남편에게 말했다.
"다올이랑 캐치볼도 하고 같이 축구도 하면 되지! 그리고 어릴 때라도 목욕 많이 시켜주면 유대감도 쌓이고 좋다더라! 목욕탕 대신 집목욕을 많이 시켜주면 되지!"
남편은 성별을 알고 며칠간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며 딸이라고 자랑하기 바빴다. 벌써부터 딸바보가 확정된 듯했다. 남편의 입꼬리는 한동안 내려 올 생각을 하지 않고 하늘로 승천할 듯 솟구쳐 있었다.
여름휴가 철이 다가왔다. 몸이 더 무거워지기 전에 휴가를 다녀오자고 남편과 얘기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친구들과 경주 바닷가에 수영장 딸린 펜션을 예약하고 놀러 갔다.
야외 수영장과 실내수영장이 넓게 있고 근처에 작은 해수욕장도 있어서 물놀이에 제격인 펜션이었다. 하지만 바닷물이나 수영장 물은 임산부에게 좋지 않다고 했다. 체온 조절도 힘들뿐더러 수영장엔 어떤 성분이 들어있는지 확인이 어렵고 바닷물 역시 좋은 영향을 끼치진 않는다는 검색 결과에 실망을 잔뜩 한 채 남편과 친구들이 물놀이하는 걸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저녁엔 펜션의 꽃인 숯불에 고기 구워 먹기도 했다. 근처 시장에 가서 가리비도 사 왔다. 이 좋은 안주들을 두고서 소주 한잔을 못 먹는다니. 무알콜 맥주를 사 와 기분이라도 내려고 소주잔에 무알콜 맥주를 따라 마셨다. 그 와중에 0.0이 적힌 맥주는 알코올이 소량 함유되어 있으니 0.00으로 표기된 맥주로 따져 골라 사다 마셨다. 일반 맥주와 비교하자면 꽤 밍밍한 맥주향을 가미한 탄산수 같았다.
음식을 배불리 먹고 술도 안 마시니 친구들의 분위기에 따라가기 힘들었다. 금세 피곤함이 몰려왔고 먼저 방에 들어가 쉰다고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한 시간 뒤 얼큰하게 술이 오른 남편과 친구들은 실내 수영장에 입성해 물을 첨벙거리며 2차 물놀이를 즐겼다. 제대로 뽕을 뽑는구나 싶었다.
남편과 친구들이 떠드는 소리에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이내 눈물이 흘렀다. 나는 놀지도 못하는데 저리도 신날까 하는 섭섭함에서 나오는 눈물이었다. 친구들은 그렇다 쳐도 남편은 나와 함께 해줘야 하지 않았나. 물놀이는 하지도 못하고 쳐다만 봐야 했던 내 모습을 보고도 저리 신나게 2차 물놀이를 한단 말인가. 서운함에 또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평소엔 이런 걸로 서운해한다거나 하는 성격이 아닌데 나 자신이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남편은 새벽 4시가 다 되어서야 술자리를 정리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괜히 남편에게 심술을 부리며 술냄새난다는 핑계로 등을 돌리고 잤다.
8월 임신 18주 차, 우린 2차 여름휴가를 가기로 했다. 저번 휴가 때 내가 제대로 놀지 못했다며 기분을 풀어주려는 남편의 계획이었다. 집에서 한 시간 반 정도 거리의 계곡 옆 글램핑장이었다. 전부터 캠핑을 하고 싶다던 내 로망을 조금이나마 실현시켜 주고 싶다고 했다. 이렇게 나를 생각해 주는 남편에게 괜히 심술을 부리는 요즘의 내가 원망스러웠다.
다니던 산부인과에 전화를 해서 계곡은 체온조절만 잘하면 물놀이하는데 전혀 상관이 없다는 허락을 받았다. 들뜬 마음을 안고 간 계곡은 생각보다 더 재미있었다. 하지만 혹시나 넘어질까 혹시나 추워질까 조심히 다녀야 했다. 30분가량을 놀다가 으슬으슬 추워진 나는 튜브보트에 몸을 싣고 담요를 두른 채 누워있었다. 남편은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보트에 나를 둥둥 뛰워 데리고 다니며 놀았다. 저번 휴가 때 서운했다고 얘기했던걸 기억하는 건지 남편은 최선을 다해 나와 놀아줬다. 이번엔 행복해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저녁엔 역시 숯을 피워 고기를 구워 먹고 장작을 태우며 불멍도 했다. 글램핑도 생각했던 거보다 더 이쁘고 시설도 좋았기에 완벽한 휴가 마무리를 보낼 수 있었다.
임신 19주, 골반에서 저릿저릿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한쪽어깨를 들어 올려 일해서인지 어깨도 점점 뻐근해짐을 느꼈다. 원래 안 좋았던 무릎 통증도 조금씩 심해졌다. 장이 예민해져서 조금만 자극적인 음식을 먹어도 화장실을 들락 거렸다.
운동의 필요성을 느꼈다. 산부인과에선 이제 안정기에 접어들어 운동을 해도 된다고 했다. 원래 pt를 꾸준히 받아 왔기에 pt를 다시 받을까 했지만 조금 더 정적이고 무리가 덜 가는 운동을 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힘을 주면 아기에게 무리가 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며칠을 고민하다 필라테스를 다니기로 결심했다. 결심한 즉시 집 근처 필라테스 센터에 등록을 했다. 임산부는 1대 1 개인레슨만 가능하다고 했다. '임산부 필라테스'라고 포털사이트에 검색해 보면 단체로 운동하던데 개인레슨이라니. 아무래도 우리 동네는 임산부가 많이 없어서 그렇다고 했다. 단체 레슨을 받고 싶으면 신도시나 신혼부부 밀집지역으로 가야 된다고 했다. 다른 임산부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는데 조금 아쉬웠다.
산전 필라테스는 약한 강도로 진행되었다. 아무리 봐도 별로 힘들어 보이지 않는 동작을 하는데 5kg이나 늘어있는 몸으로 동작을 하니 땀이 삐질삐질 났다. 임신 전에 이런 강도로 운동을 했으면 간에 기별도 안 갔을 텐데 역시 임산부의 몸은 다르긴 다르구나 싶었다.
새벽에 3~4번은 깨서 화장실을 가야 했다. 방광이 작아진 걸까. 자궁이 커지면서 장기를 눌려 방광에 압박이 가해져서 화장실을 자주 간다고 하던데 이거 압박이 가해져도 너무 많이 가해지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화장실을 자주 갔다. 당연히 매일 밤 잠을 설쳤다.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점점 말로만 들었던 임신 중 변화가 내게 닥치고 있었다. 감정이 소용돌이쳤고 몸이 전과 다르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듣던 대로 엄청 힘들고 죽을 거 같진 않았다. 견딜만했고 참을만했다. 감사하게도 입덧은 없었고 딱히 먹고 싶은 게 엄청 생각나거나 입맛이 까탈스러워지지는 않았다.
전보다 제약도 많아졌고 친구들과 어울리지도 못했다. 활동적인 성향인 나로서는 가장 큰 불편함이었는데 그 역시 '어쩔 수 없으니까. 당연히 그래야지.'라고 생각했다.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살아야 했던 28살까지의 나는 조금씩 엄마를 배우고 있었다. 하고 싶은걸 다 하지 못함을 알고, 참는 걸 배우고, 견디는 걸 배우고 있다. 아직 엄마라는 게 뭔지 잘 모르는 철부지 지만 조금씩 알아가고 배우는 중이다.
나도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