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캠브릿지 하프 마라톤
박사과정은 마치 마라톤과 같다.
박사과정에 대한 은유로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박사과정은 단거리가 아니라 장거리이니 너무 처음부터 힘을 뺄 필요 없다는 의미다.
박사과정이 마치 마라톤이라면
MIT 박사과정은 마치 보스턴 마라톤과 같다.
사람들이 열광하고, 그곳에서 뛰고 싶어 하며, 그곳에서 뛰기 위해서는 그곳에서 요구하는 최소한의 요건을 맞춰야 한다. 보스턴마라톤은 세계 6대 메이저 대회 중 하나이며,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닌 연례 마라톤이다. 가장 유명한 마라톤 레이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지만, 그만큼 어려운 코스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많은 코스로 난코스다. 보스턴 마라톤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참가자의 연령/성별 범주에 따라 필요한 조건을 공식 마라톤에서 완주해야지만 참가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MIT에서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그전에 있던 곳에서 연구를 아주 잘 해내는 성과를 보여주어야 한다.
MIT박사과정에 대한 보스턴 마라톤 비유는 참으로 적절하다. 마라톤이라는 비유는 너무 과하게 빨리 달리지 말라는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34세의 남자 이하는 sub-3, 즉 3시간 이하로 완주를 해야 참가할 수 있다. 42.195km를 3시간에 완주한다는 것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달린다는 뜻이다. 대략 14km/h로 달린다는 뜻인데, 러닝머신을 달려본 사람이라면 14km/h가 얼마나 빠른 속도인지 알 것이다. 1km를 대략 4분 15초에 뛰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 속도로 1km, 혹은 4분 이상 뛰기 어렵다. 그런데 그 속도를 유지하며 42.195km를 무려 3시간을 뛰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래 뛰어야 하는 것도 맞지만, 생각보다 엄청나게 빨리 뛰어야 한다. 지금 느껴지는 중압감이 내가 MIT에서 박사과정을 하며 느끼는 부담과 비슷하다. 뇌과학의 경우 실험을 많이 해야 하기 때문에 보통 6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굉장히 오랜 시간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그 오랜 시간 동안 하루하루 굉장히 열심히 최선을 다해 연구하고 공부해야 한다. 왜냐하면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마라톤을 뛰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꾸준하게 오랜 시간을 뛰어야 MIT에서 박사과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기왕에 MIT에서 박사과정을 하니 6년 동안 노력해서 보스턴 마라톤을 꼭 뛰어야겠다는 목표가 생겼다. 목표가 생긴다면 언제나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탑다운 (Top-down)으로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마일스톤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캠브리지 하프마라톤이다.
그리고 지난주 하프마라톤을 완주했다. 빠르지는 않지만, 내가 견딜 수 있는 속도로 조절하며 걷지 않고 끝까지 완주했다는 것에서 정말 큰 뿌듯함을 느꼈다.
아직 풀 마라톤을 sub-3로 뛰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하프 마라톤을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속도로 뛰는 것은 가능했다. 다음 목표는 내년에 조금 더 빠른 속도로 하프마라톤을 완주하고, 내 후년에는 풀마라톤을 완주하는 것을 목표로 조금씩 조금씩 달려보아야겠다.
마라톤을 뛰면서 느낀 것은 이건 결국 다른 사람과의 경쟁이 전혀 아니라는 점이다. 캠브릿지 하프마라톤의 경우 7천 명이 넘는 사람이 뛰었지만, 다른 사람이 얼마나 빨리 뛰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함께 뛰는 사람들이 서로를 응원해 주고 힘이 되었다. 내가 나의 속도를 찾아서 원하는 목표까지 도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다. 또한 10km를 넘어가는 순간부터는 몸이 자동으로 움직인다. 러너스 하이라는 느낌이다. 뇌가 명령하지 않아도 마치 다리가 자동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지고, 그 이후부터는 크게 몸이 힘들지 않고 기분이 너무 좋다. 습관의 힘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는 경험이었다.
마라톤도 결국은 처음에 나의 속도를 잘 찾아 그 속도에 맞추고, 어느 순간 습관이 되면 크게 힘들지 않고, 마지막으로 마칠 때 조금만 더 힘을 내어 노력하면 완주할 수 있었다.
마라톤도 결국은 그 순간순간 한걸음을 딛어야 한다.
박사과정도 마찬가지다. 6년 뒤를 생각하면 너무도 막연하고 무섭지만, 그 6년 뒤에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지금 필요한 것에 집중하면 하나씩 하나씩 해낼 수 있다. 일단은 이번학기 수업을 열심히 듣고, 나에게 가장 잘 맞는 연구실을 찾는 것에 집중할 것이다. 그리고 천천히 내가 원하는 연구 주제를 찾을 것이고, 좋은 루틴을 만들 것이다. 그 루틴을 따라가면 생각보다 많은 일들이 쉽게 잘 준비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조금만 더 힘을 내서 논문자격시험을 준비하고, 최종적으로 학위 논문을 쓰는 한 걸음 한 걸음에 집중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MIT에서의 박사과정을 마치 보스턴 마라톤처럼 나도 해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