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직활동가 Aug 25. 2018

벼려야 친해질 수 있는 친구

트레바리 <쓰는인간> 마지막 독후감

대학교 4학년 때 시사주간지에 <졸업유예자의 밥벌이>라는 귀여운(?) 칼럼을 기고한 적이 있다(http://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27116​).


문예창작학과 졸업을 앞두고 과연 대학에서 무얼 배웠나 하는 회의감이 들었던 때 였다. 글쓰기는 비루한 현실에서도 스스로 괜찮다고 여기게 한 '마약'이었다.

우리는 삶의 통과의례에서 글에 매달린다. 자소서는 나를 뽑아달라는 애처로운 구애에 가깝다. 최대한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해 독자가 될 인사담당자에게 글로써 나의 '쓸모'를 드러낸다.


4차 산업 혁명 시대에도 회사에 알맞는 사람을 고르기 위해 직접 쓴 글을 중요하게 본다니. 어쩌면 인간은 '글'이라는 수단을 지나치게 믿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자소서대로 살지 않았다. 예상하기 어려운 인생의 수많은 사건을 '의미있게' 발견했을 뿐이다.

결국 해석의 작업이다. 이 해석이 우리가 말하는 '관점'이다. 따라서 언제든 쓸 수 있는 장비가 필요하다. 고 노회찬 의원은 이슈에 대해 항상 자기 생각을 정리해두는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신선한 비유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으면 제대로 말할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머리 속에 잘 벼려둔 생각들을 차곡차곡 쌓아둬야 한다. 그런 다음 차분히 생각덩어리를 연결하고 기우면 좋은 글이 될 가능성이 높다.

저자가 쓴 낱말이 낯설게 느껴졌다. 유독 '신체'라는 단어가 생소했다. 필사는 당연히 신체를 쓰는 일이다. 손으로 글씨를 베껴쓰니 말이다. 그런데 저자는 '감응하는 신체'에 관해 논했다.


생각을 키우기 위해, 다시 말해 글 쓰기 위해 몸을 만들어야 한다는 기본 개념이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저자가 권하는 글쓰기 모임에서는 구성원의 이야기를 꽤 들을 수 있다. 그러면 간접적으로 많은 경험이 쌓일 것이고, 서로 생각을 나누다 보면 어느덧 이들은 각자 사정을 이해하는 것과 동시에 오롯이 자신만의 방에 들어가게 된다. 이게 바로 '주관'이 아닐까 싶다.


글쓰기 모임은 자연스레 '생각하는 인간'을 만들어 낸다. '감응한다'는 쉽게 말해 다른 이의 말을 주체적으로 들어가며 생각을 나누는 능력을 뜻하는 게 아닐까. 아직 감응하는 신체로 변모하지 않은 것 같다. 다만 토론하기 위해 생각을 1000자 이상으로 정리하고자 했고, 습관에 가까운 일이 된 것 같아 뿌듯하다.

글은 더는 작가 혹은 학문하는 이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누구든지 언어를 가질 수 있고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혼자 끄적여 쓰는 일기도 글이고, 죽기 전에 남겨 읽히길 바라는, 유서도 글이다.


글의 범주가 너무 넓어서 오히려 목적을 정해두고 글을 쓰지 않으면 저자의 말처럼 감응하는 글쓰기에 도달하기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적어도 글쓰기를 통해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갈 수도, 희망을 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평생동안 노력해야 할, 요망한 친구를 두게 됐다.




작가의 이전글 여전히 글은 권력일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