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정적이라는 편견이 있다. 하지만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여행도 즐기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호기심이 충만한 사람이다. ‘책은 앉아서 하는 여행’이라는 말도 있듯, 나 역시 두 가지의 차이보다 공통점에 주목하는 편이다. 나에게 책이 매일 먹는 밥이라면, 여행은 특별식처럼 느껴진다. 둘 다 삶을 살찌우는 고마운 양식이다.
초보 여행가와 초보 독서가는 서로 닮았다. 아직 자신만의 기준이 없으니 남들의 추천에 따라 방문하고 읽게 된다. 가령, 파리 여행에 간다면 에펠탑과 개선문을 꼭 봐야 하고 센강에서 유람선을 탄다. 책은 베스트셀러 순위부터 점검할 것이다.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자신의 노하우가 쌓이기 전까지는 앞서간 사람들의 경로를 참고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안전한 경로가 조금씩 진부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진다면, 색다른 시도를 해볼 차례다. 두 가지를 혼합하는 방식이다. 여행지에서 책을 경험하는 가장 쉬운 방법! 책방지기의 안목과 취향에 따라 큐레이션 한 책을 만나볼 수 있는 곳, ‘독립서점’에 들르는 게다. 전국의 독립서점을 찾아주는 ‘동네책방’ 사이트에 따르면, 전국에 독립서점 개수는 900개(2024년 5월 20일 기준)로 적지 않은 수다. 여행지 근처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책만 파는 곳도 있지만, 강연이나 독서/글쓰기 모임을 운영하기도 한다. 숙박을 겸한 ‘북스테이’ 공간도 있으니 일정이 맞으면 하루쯤 책 속에 파묻혀 지내보는 것은 어떨까. 독립서점은 단순히 책을 사고파는 장소가 아니라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나는 문화공간이다.
내가 독립서점을 찾는 이유는 독특하거나 잊힌 책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는 점 때문이다. 대형 종합서점에서는 수많은 책에 압도되어 어디부터 살펴봐야 할지 막막해질 때가 있다. 결국 만만한 베스트셀러 근처를 배회하게 된다. 그러니 늘 보던 책들에서 머문다. 독립서점은 장소가 좁고 책이 적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점이 시야를 확장해 준다.
제주 여행을 갔을 때 들렀던 독립서점 중 기억에 남는 세 곳이 있다. 여행 마지막 날, 비행기 시간이 좀 남아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을 수 있는 장소를 찾고 있었다. 검색해 보니 가장 가까운 곳에 ‘달책빵’이라는 독립서점이 있었다. 아기자기한 제주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는 베이커리 북카페였다. 내가 좋아하는 달과 책과 빵을 조합한 이름부터 마음에 들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나무 형태 그대로의 멋이 살아있는 대들보와 높은 천장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공간이 아담해 책이 많지는 않았지만, 개성 넘치는 독립 서적이 꽤 있었다.
한 시간여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었고, 가끔 고개를 들어 열린 창문으로 불어오는 부드러운 바람을 즐겼다. 운영이 녹록지 않은 걸 알기에 독립서점을 나설 때면 무조건 책 한 권 이상 사서 나온다. 무엇을 살까 고민하다가 《제주의 말 타는 날들》이라는 ‘제주스러운’ 제목이 눈에 띄었다. 저자 김용희 씨가 제주 도민이냐고 묻자 책방지기가 그렇다고 했다. 이곳에서 진행하는 독립 출판 수업에 참여한 저자가 첫 책을 출간했다고 하니 더욱 의미가 있는 책이었다. 난생처음 승마를 배우는 초보자의 우여곡절이 담겼다. 책 표지처럼 문체가 아주 귀엽다.
‘풀무질’이라는 독립서점도 빼놓을 수 없다. 26년 동안 서울 성균관대 명륜캠퍼스 앞에서 같은 이름의 서점을 운영하던 주인이 제주 구좌읍에 와서 차린 곳이다(종로에 있는 풀무질도 청년 주인이 바통을 이어받아 여전히 운영 중이다). 건물은 작고 아름다웠으며 책은 부족함이 없다. 서점을 찾은 사람들의 명함이 어찌나 많은지 벽에 도배되어 있었다. 이름을 알 만한 사람도 꽤 다녀갔다.
대형서점에서는 전면에서 보기 힘든 수준 높은 인문사회과학 서적들이 평대에 보란 듯 놓여있다. 대학 시절에 읽(는 척 했)던 《민중의 세계사》나 《난쟁이가 쏘아 올린 공》같은 책을 오랜만에 발견해 반가웠다. 트렌디한 책들이 쏟아지는 지금에 만난 그 책들은 나를 타임머신에 태워 과거로 이동시키는 오묘한 기분을 선사했다.
제주 이야기 코너도 따로 마련되어 있다. 유홍준 선생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제주 편》을 몇 번이나 만지작거리다가 내려놓았다. 보다 독립서점 풀무질의 느낌을 담은 책을 찾고 싶었다. 결국 선택한 두 권은 제주 4.3 70주년에 출간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시 모음집 《검은 돌 숨비소리》와 장호종의《기후 위기, 체제를 바꾸자》라는 책이다. 장호종 씨는 현직 의사인데 기후 위기의 원인을 자본주의로 보고 날카롭게 비판했다. 저자가 궁금해 정보를 찾아보니 반자본주의 주간신문 <노동자 연대>의 기자로 다양한 사회운동에 앞장서는 분이었다. 평소 기후 위기에 관심이 많기도 했고, 풀무질의 ‘이달의 독서모임’ 책으로 선정되어 있기도 해 집어왔다.
종달리에 있는 ‘소심한 책방’도 떠오른다. 그림책이 꽤 많았고, 2층에는 성산일출봉이 보이는 다락방이 마련돼 있었는데 예약을 하면 두 시간 단위로 대여 가능하다고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혼자 와서 책을 읽거나 작업할 때 딱이겠구나 싶었다. 책방지기의 기획력이 돋보이는 코너들이 눈에 띄었다. 가령, 포장지에 싸서 정체를 감춘 ‘숨겨둔 책’같은 것. 여행 중 친구나 연인에게 서로 선물하면 추억이 되겠다. 제주 곶자왈 커피와 책을 함께 패키징 한 선물 세트도 기념품으로 괜찮을 것 같고.
이처럼 흥미로운 독립서점. 어쩌다 들르는 게 아니라, 일부러 여행 코스에 넣을 만하다. 아는 분은 아예 날을 잡고 한 지역을 정해 ‘독립서점 투어’를 하기도 한다. 책이라는 물건을 떠올렸을 때 고리타분한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면, 남들 다 보는 책 말고 독특한 책을 발견하고 싶다면, 여행과 지역의 독립서점을 요령껏 버무려보길.
*여행지 독립서점 방문 Tip.
- 카페를 겸하지 않는 곳도 많으니 방문 목적에 따라 미리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는지, 음료 주문이 가능한지 확인하기 - ‘동네서점(bookshopmap.com)’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전국 독립서점 지도와 서점 특징, 좌석수, 휴무일 등을 자세하게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