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 사이에 피어난 시
상처가 쌓여 가는 방
언젠가는 아물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라며
나는 허공에 붙어 있었다
구석에 뭉쳐 있던 나를 꺼내본다
고통을 청소한다면
가장 가까운 도구는 아마도 실감일거야
너덜너덜한 현실감이 걸레처럼 쓰다듬어주거든
아팠던 방을 청소하고 나면
탈취제처럼 웃음이 터져 나온다
비참하다는 건 보통 어둡지 않나
이렇게 반짝이는 방이 어딨어
방문을 나오면서
어두운 얼굴이 속삭인다
아팠네 진짜
상처는 보통 회복되어야 하는 것인데 회복되지 않고 덮어둬야 하는 상처도 상처다. 엄마가 신장 투석을 시작하고 간병을 도맡았던 10년 남짓한 세월은 지금에서야 상처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깊이 팬 내 인생의 구간이다.
그때 나의 모습을 돌아보면 어떻게 살았나 싶은 기분이 든다. 입원 이야기가 나오면 엄마와 나는 기계처럼 짐을 쌌다. 수많은 시술 혹은 수술서에 서명을 하며 절차를 밟고, 엄마가 안정될 때까지 병원에서 지내는 건 내 몫이었다. 아침마다 병원에 들러 필요한 것을 나르고 퇴근하며 먹을 것을 사 갔다. 집에서는 꼬박꼬박 나오는 빨래를 돌리고 밥을 해놓고 화장실과 방을 청소했다. 언젠가는 화장실 구석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빨랫감을 보며 소리를 질렀고 설거지를 하며 허공에 그릇을 던진 적도 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옛말을 실감할 때쯤에 엄마를 떠나보냈다.
난 엄마가 아프다는 걸 아는 아주 가까운 친구들에게도 곪아가는 속내를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굳이 아픔을 자랑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랫동안 ‘사람들은 왜 이렇게 아픔을 쉽게 여길까?’라는 질문에 휩싸이기도 했다. 조금만 아파도 소리를 지르는 사람을 보면 이상했다. 내가 아는 아픔과 다른 사람이 아는 아픔이 다른 것 같아 혼란스러웠다. 특히 아픔을 전시하고 마음껏 징징거리는 사람을 보면 신기했다. 오만하게도, ‘진짜 아픈 걸까?’라고 의심해 본 적도 있었다. 진짜 우울한 사람은 우울하다고 말하지 않는다고, 진짜 비참한 사람은 비참하다고 말하지 않는다고, 진짜 아픈 사람은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진짜 그러하다는 게 대체 무엇인가.
힘들고 아프다고 말하는 대신 쌓여가는 고통을 바라보는 걸 택했던 나는 상처 위에 너덜너덜한 밴드처럼 대충 살고 있었다. 엄마가 떠나고 나서야 ‘나 아팠네’ 할 수 있었다. 치료하는 방법은 모르겠다. 아물 수 있는 상처라는 생각은 안 들고 이제 겨우 딱지를 만드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문장 사이에 피어난 시; 에세이 속 단어 조각을 모아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