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 사이에 피어난 시
오랫동안 죽음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나에게는 삶이 더 두려운 것이었어요
죽음이 안쓰러웠습니다
일상에 겹겹이 묻어
이래저래 따라다니다 사라지는 죽음
떠난다는 건 이상하지 않은 일입니다
살아가는 건 사라지는 것이니까요
죽음을 그걸 알면서도
우리에게 비밀로 합니다
죽음과 자주 대화 하면
죽음이 경력이 됩니다
죽음과 나는 서로를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게 됩니다.
떠나면 안 돼?
떠나면 안 돼.
살아있는 것과
사라지는 것 사이에는
세계가 있습니다
아주 길고 진한 고통과 사랑의 세계
보내고 싶고 보낼 수 없는
삶이 있습니다
나의 경력은 죽음이다. 죽어본 적 있거나 죽음에 관한 직업을 가진 적은 없지만 아픈 엄마와 있으면서 언제나 죽음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물론 엄마의 죽음을 또래보다 일찍 겪었으니 그 또한 경력일 수도 있겠다.
엄마의 아픔을 이야기하면 위축되던 때가 있었다. 다들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봐주고 나를 불쌍히 여기기도 해 '내가 뭐 잘못을 한 건가' 싶었다. 지나치게 나를 걱정하거나 내 일상을 자신들과 다른 삶으로 취급하는 느낌을 주는 사람들 앞에서는 괜한 얘길 했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매일 몇 번씩 투석하거나 입원이 잦은 엄마와 사는 건 좀 다른 일상이기는 했지만, 나는 이게 뭐 어떠냐는 생각으로 살았다. 쿨한 척이나 자존심 문제라기 보다는 나에게는 정말 당연한 일이어서 그랬다. 언젠가 엄마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몸'이라는 말을 꺼냈다. 그러고선 나와 함께 "그래, 죽음을 무서워하기보다는 계속 얘기하는 게 더 낫지"라는 식의 대화를 했다.
오래 아픈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쉽게 생각하기보다는 좀 더 소중히 여기게 되는 것 같다. 어떤 식으로든 죽고 싶지 않다, 고통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보다 이렇게 죽고 싶다는 다짐이 생기는 것이다. 아픔을 절망으로 받아들이면 죽음도 절망이 되지만 아픔이 익숙해지고 아픔을 삶으로 흔쾌히 받아들이게 되면 죽음은 '삶의 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다.
슬픔은 별개의 문제다. 이래저래 어찌할 수 없는 ‘죽음‘은 늘 나를 따라다녔고 엄마의 아픔과 죽음을 경력 삼아 나는 사라지고 떠나는 일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 글에 관한 자료 조사를 할 때도 나는 꼭 죽음에 관한 공부를 했다. 사후 세계를 오가는 무당이라던가, 염하는 방법이라던가, 장의사의 삶이라던가 죽음에 가까운 사람이나 상황을 궁금해했다.
죽음을 많이 알아보고, 죽음이 경력이 된다는 건 사는 일을 더 오랫동안 생각하게 되는 일 같다. 지금은 엄마도 떠나고 친했던 엄마의 친구분도 죽음으로 떠났지만 그 죽음들로 나는 나의 삶을 더 겹겹이 생각하게 된다. 죽음이 곳곳에 진하게 묻어 있는 삶을 말이다.
문장 사이에 피어난 시; 에세이 속 단어 조각을 모아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