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를 기다리는 마음

by 문수인



오늘 낮에 점심 먹고 산책하는데 조금만 걸어도 땀이 났다. 장마가 지나고 숨쉬기도 어려울 만큼 더워지면 긴 산책은 어렵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여름을 잘 나기로 마음먹었어도, 무작정 볕에 다가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까. 치고 빠지는 기술-짧은 산책 후 시원한 에어컨 바람 쐬기-이야말로 여름을 사랑할 수 있도록 돕는다고 믿는다. 긴 장마 기간엔 맑은 날씨가 그리워지는 것처럼, 반대의 존재들이 서로의 존재를 더 부각해주기도 하니까.


어제보다 날이 부쩍 더워져, 날씨를 검색해 보니 목요일부터 연이은 비소식이 있을 거라고 한다. 여름을 잘 나려고 마음먹은 것처럼, 장마 기간에도 있는 그대로 즐기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문득, 장마를 잘 살아내기 위한 방법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GPT에게 물었다.


‘지나야, 장마를 어떻게 즐기면 좋을까?’


GPT는 다정하게 몇 가지 방법을 제안했다.

1. 우산 없이도 떠날 수 있는 여행 : 창문 너머 풍경을 바라보며 차 한잔과 함께하는 시간

2. ASMR처럼 쏟아지는 빗소리를 듣는 것 자체가 감각을 깨우는 명상으로 변할 수 있다.

3. 비 오는 날 들으면 좋은 음악 추천

4. 장마 일기 쓰기 - 매일 같은 듯 다른 비의 얼굴

5. 비 오는 날 산책의 묘미 - 우산을 쓰고 걷는 느린 산책, 비에 젖은 나무 냄새, 고요한 거리, 고인 물 위로 반사되는 풍경

6. 못 나가는 날을 기회 삼아 해보는 새로운 취미


추천해 준 것들에는 내가 해보지 않은 것도 있었고, 장마 기간마다 즐겨하는 행동도 있어서 흥미로웠다. 먼저 장마기간 빠지지 않고 즐기는 것은 비 올 때마다 플레이리스트를 바꾸는 것이다. 계절마다 대표하는 노래가 다르듯, 비가 오는 날도 항상 생각나는 노래가 있다. 헤이즈의 ‘비도 오고 그래서’, 비스트의 ‘비가 오는 날엔’, 에픽하이의 ‘우산’ 등을 순차적으로 듣고 가사 없는 플레이리스트를 듣기도 한다. 비 오는 날의 고요함을 닮은 그런 노래. 이렇게 지난 장마를 회상하다 보니, 자각하지 못했을 뿐이지 장마를 꽤 즐기고 있었단 생각이 든다.


비 오고 난 후, 산책하는 것을 좋아한다. 비에 젖은 나무에서 피어나는 향은 평소 서점에 가서 책 냄새보다 훨씬 더 진하고, 편안하고, 향긋하다. 맑은 날엔 몸의 온 감각을 코에 집중해야만, 혹은 바람의 도움을 받아서 농도 낮은 향을 어렵게 알아차릴 수 있었는데, 비 온 날은 코에서 먼저 나무의 존재를 감각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윤슬처럼 반짝이는 나무만큼이나 찬란하고 선명하게 다가온다.


반면에 내가 장마 기간에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건 장마 일기와 해보지 않은 취미 도전이었다. 비 오는 날은 남편과 함께 밖에 나가기로 했던 계획을 취소하고 소파에 반쯤 누워 유튜브를 켠다. 무료하고 여유롭게 티비 속에서 거닐다 낮잠을 잔다. 나름대로 실내에서 편안하게 보낸 일상이지만, 자려고 누우면 오늘 하루를 허투루 보낸 것 같아 찝찝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마침, 그리려고 샀던 페인팅이 피아노 옆에 몇 달간 방치되어 있는 게 생각났다. 이번 장마는 그림을 그려야지, 생각했다.


장마 기간을 즐겁게 보낼 수 있는 방법들을 생각하니 글쓰기 전 목요일의 비 소식을 못내 아쉽게 생각했던 마음과 달리, 반갑게 맞이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피할 수 없어서 견디는 것이 아니라, 계절의 순환을, 장마의 모든 순간을 함께 살아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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