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여 정도의 해외근무 생활이 끝나고, 본사로 복귀를 했다. 갑자기 짧아진 근무시간에 정말 기분이 좋았다. 주말이 무려 이틀이나 되었으니 친구들도 만나고 영화도 보고 늦잠도 잘 수 있게 되었으니 정말 워라밸이 실현되는구나 생각이 들었다. 기존 사수와도 바이 바이를 했으니 너무 좋았다. 그렇게 본사에서의 회사생활에 적응해 갈 무렵, 다른 팀으로 가게 되었는데 마침 함께 일하던 선배들과 같이 가서 업무도 무던히 적응할 수 있었다. 이 팀에는 사원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는데, 그 덕(?)인지 거의 프로젝트에 끊이지 않게 포함이 되었다. 그러던 중, 모두가 원하는 동남아 프로젝트를 하게 되었다. 회사 사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에 거는 임원의 기대는 컸고, 이에 꼭 해내고야 말겠다는 30대 후반의 매니저의 열정이 아주 넘쳤던 팀이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이었다. 나의 열정은 그대로였다.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고 그냥 주어진 임무를 묵묵히 하면 되겠지 하는 정도. 그렇지만 이 사람들은 회사의 사활을 걸고 일하는 것처럼 보였다. 남일에는 사실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에, 저 사람들은 나름의 목표가 있나 보다 하고 그냥 내 일이나 조용히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부턴가 나의 영역까지 침범해 오기 시작했다. 내가 본인들의 열정과 야망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일까. 일을 마무리하고 집에 가는데 연락이 온다. 어디냐. 왜 퇴근했냐. 포기할 법도 한데 몇 날 며칠을 계속 보내면서 내 퇴근 후 위치를 감시하는 듯했다. 주말 근무는 반강제적인 필수였다. 첫 번째 이유는 회사가 어려우니 그냥 나와야 한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 이유는 일단 나와서 프로젝트 일을 좀 하란다. 난 평일에 다 끝냈는데 이건 뭐 일을 만들어서 추가로 시킨다. 주말 근무수당은 올려도 되냐고 되물으니 미친 애 취급을 했다. 내가 평일에 일을 끝낼 수 있었던 건 출근을 빨리하고, 점심시간을 쪼개서 일을 했기 때문이다. 나에게 주어진 업무이니까 월급 받고 일하는 사람으로 나름 책임감을 가지고 했는데, 이 사람들은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는다. 본인들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오로지 근무시간, 회사에 누가 늦게까지 남아있나 내기하는 것 같았다. 내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사실 전 사수와 별 차이가 없었다. 주기적으로 담배를 피우러 나가고, 네이버로 웹서핑을 하고, 밤이랑 주말에 학교를 다닌다고 회사에서 과제를 하고 있다. 제발 업무시간에 일만 딱하고, 집 가서 하면 안 되나요? 아니면... 내가 정말 이상한 건가?
이 팀의 클라이맥스는 회식이었다. 술도 잘 마시지 못하기도 했지만, 내 '소중한' 시간을 친구 가족 연인과 보내기도 빠듯한데 이 사람들과 회사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서 회식자리를 좀처럼 가지는 않았다. 하루는 프로포잘 제출 기념 겸, 모두 참석하기를 종용하길래 큰 맘먹고 내 시간을 '할애'하기로 했다. 팀 사람들이 회식 메뉴를 오전, 오후 내내 고민하더니 결국 전무 집 근처 전무가 먹고 싶어 하는 메뉴로 잡았다. 묻지를 말던가. 회식은 마치 북한의 지도자를 찬양하는 모습 비스름했다. 전무가 앉아있고, 주변에 딸랑이들이 앉는다. 전무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열렬하게 손뼉을 치는데 정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내 앞에서 가오 잡던 매니저와 그 밑에 대리 과장들이 전무 앞에서 어수룩한 척 아부를 한다. 드라마는 정말 현실을 그대로 아니 오히려 더 못 보여 주고 있다. '아 이 답답한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다.' 답답한 마음에 친구와 밖에서 통화를 하고 들어오는데, 회식인데 자리 비우고 어디 갔다 왔냐고 그렇게 면전에서 핀잔을 준다. 전화 좀 하고 왔다니 옆에 여자 대리시켜서 여자 화장실부터 식당 주변을 싹 훑었는데 내가 없었다고 했다. 바로 문 앞에 있었는데 그냥 내가 싫었던 모양이다. 여기서 다시금 이차 소름이 돋았다. 밖에서 전화하고 왔다는데 내 말은 듣지 않고 또 본인 말만 한다. 그냥 사람들 앞에서 나에게 면박을 제대로 주고 싶었던 것이 분명해 보였지만,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냥 전형적인 '꼰대'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차도 가지고 왔고 먹는 약이 있어서 술을 못 마신다고 하니 또 대놓고 핀잔을 준다. 내 시간을 이렇게 의미 없이 소비했는데, 내 몸에 받지도 않는 술을 마시고, 내 돈을 써서 대리 불러서 집에 가라는 건가? 화가 머리까지 치밀었지만 참았다. 내가 다시는 이런 회식자리를 오나 보자.
오랜만에 회식에 간 나를 타깃으로 다들 벼르고 있던 듯, 하도 공격을 해서 정말 화가 많이 났었기 때문에 이 날의 회식, 분위기, 한 장면 한 장면 아직도 잊히지가 않는다. 더 가관인 것은 다음날 다들 2차 3차를 가서 얼마나 술을 먹었는지 오전 내내 회사 화장실에 틀어박혀 나오지도 않았다. 이날도 나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출근해서 일을 했지만 그들은 보지 못했을 것이다. 오전 내내 화장실에서 자다가 해장국 먹고 오후쯤 어제 주량에 대한 무용담을 늘어놓고 있었으니, 저 미친놈 사원은 일 안 하고 또 시간 맞춰 퇴근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라 짐작했다. 그들의 입장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는 일을 하지 않았다. 회식도 잘 안 가고 술도 안 먹고 전무에게 딸랑거리지도 않았으니, 회사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업무를 안 한 것이 맞다.
친한 동기 언니가 한 번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외눈박이 세상에서는 눈이 두 개 있는 게 이상한 거야. 이런 이상한 회사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내가 문제인가 한동안 생각했었는데, 내가 있는 곳이 외눈박이 세상이라고 여기니 답은 간단해졌다. 맞지도 않는 옷을 입고 어설프게 아부하는데 내 인생과 에너지를 소비하느니 내 삶을 위해, 나를 위해, 내 주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내 시간을 투자하는 게 더 의미 있다 생각했다. 내 인생은 한 번이고, 내 시간은 24시간으로 한정되어있고, 세월은 계속 흘러가니까. 개개인이 다른 삶의 목적을 가지고 살 것인데, 그걸 좀 인정해 줬으면 했지만... 역시 그것은 헛된 기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