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오늘은 춥다
옛날에 살던 동네에 왔다. 벌써 이사한 지 5년째. 그런데도 삑 하면 이곳에 오곤 한다. 한동안 뜸하긴 했다. 지난여름, 내게 여름은 너무 더웠고, 끔찍했다. 여름을 싫어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걱정이 많았다. 늘 긍정적인 편인데 이번엔 아니었다. 사춘기 소녀처럼 인생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잔걱정은 많아도 금세 업되는 편인데 올여름은 슬픈 감정만이 나를 엄습했다. "겪어봐야 안다."는 말. 실감 났다. 병원에 자주 다니는 편이 아닌데 아버지를 모시고,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로 갔다. 이런저런 질문을 하던 여의사는 "평소에 아버지와 소통이 별로 없었나 봐요." 뭐 하나 아버지의 몸상태나 평소 루틴에 대해 설명을 못하니까 의사가 답답한 듯 말했다.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부끄럽지만은 않았다. 나를 질책하는 듯한 여의사가 오히려 고마웠다. 그게 시작이었다. 아버지는 중간중간 나아지는 가 싶더니 중환자실에 두 번 다녀오셨다. 그리고 안정이 된다 싶었는데 당장 퇴원하기는 불안하다고 했다.
아버지는 국가유공자라 중앙 보훈병원으로 모시고 싶었는데 코로나로 여의치가 않았고, 입원한 병원에서 장기입원 연장 신청서를 2주에 한 번씩 보훈처로 보내야 했다. 그러다가 지난주에는 퇴원하고, 요양병원으로 입원을 권했다. 같은 급의 병원으로는 옮길 수가 없다는 것. 다행히 아직은 특별히 나빠진 게 아니라는데 사실 언제 어떻게 악화될지 몰라 두렵고 불안하다.
한편으로는 '인명은 재천'이라며 오직 신의 뜻대로... 하며 내려놓고 있기도 하다. 사람의 생명은 유한하니까 천년만년 살 수는 없지만, 적어도 주변 사람들과 화해하고, 서로 사랑하는 마음만은 간직하고 계셨으면 좋으련만... 한 집에 살던 나 역시 아버지와 가까이 지내는 편이 아니라서 많이 후회되고, 죄송하다.
아버지는 병원에 계시고, 혼자 집을 지키고 있으려니 한편으로는 편하지만,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하고, 아버지 없이 나만 편한가 싶어 죄책감이 들기도 한다. 계절은 벌써 늦가을이다. 그 무덥던 여름, 아버지가 기력이 쇠하신데 잘 챙겨드리지도 못하고, 일이 바빠 출장이고 뭐고 하면서 집에 붙어있지 못했다. 무슨 대책이라도 세웠으면 좋았을 텐데 금세 환자가 돼버리실지 몰랐다. 한마디로 무심했고, 안일했다.
한번 모시고 가야지 했던 치매검사도 못 받았고, 맛있는 음식도 자주 해드리지 못했다. 아버지는 기력이 없으셔서 매일 아침 복지관으로 병원으로 혼자 다니시던 분이 두문불출, 소파에만 앉아계시다가 출장 다녀오니 침대에 누워만 계셨다. 하루, 이틀 돌보다가 도저히 안돼 아버지 동의하에 병원에 입원했다.
병원에 가기 전날, 밤새 잠도 안 오고 아버지 발톱을 깎아드렸다. 그리고 벌써 입원한 지 석 달째가 되었다.
어제도 잠을 못 잤다. 집 도배, 장판 교체하느라 오늘 아침 일찍 인부들이 오기로 돼 있어서 짐을 다 챙겨놔야 하는데 발등에 불 떨어졌다. 아버지 방에서 짐을 싸다 보니 아버지의 일기장을 발견하고, 그거 읽느라 날을 새게 되었다. 아버지에게도 순정과 로맨스가 있었다.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지극히 감정적이고 낭만적인 성격... 지금 내 나이보다 많으셨을 때인 50대 후반~ 60대까지의 일기가 주욱 있었는데 내용이 애잔해서 잠이 달아났다. 한참을 읽다가, 짐도 챙겨야 해서 바삐 챙기고 나니 마무리가 된 시간이 새벽 다섯 시. 그때부터 내방과 냉장고 물건을 챙기니까 아침이 밝아왔다.
그래도 아버지를 뺀 우리 가족은 가족 간의 온기를 느끼며 살아왔는데 아버지는 거의 혼자 가족과 떨어져서 지냈고, 최근 앨범에는 우리 가족은 누구 한 명 없고, 모르는 사람들과, 혹은 동창회 사진뿐이었다. 많이 쓸쓸하고 외로우셨을 것 같아 가슴이 먹먹했다. 사정이야 없는 게 아니지만, 아버지의 깊은 속내는 사실 잘 모르겠다. 그저 안 해도 될 고생을 사서 하시고, 괜한 인연들을 만들고 정작 원 가족과는 친밀하게 지내지 못하신 것.
나 역시 같이 살면서도 데면데면하게 지낸 게 안타깝다.
많이 슬프고,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이제는 이런 상태로 담담해지고 있다. 이럴수록 정신을 바짝 차리고, 단단해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