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황

기억의 단상

ㅁ 기억의 단상 - "주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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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 그 사람의 얘기를 오래 끌어 미안.
네가 사랑에 빠졌다면 꿈틀꿈틀 가슴 한가운데, 뭔가 알지 못할 물기가 치밀어 오르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주황색으로 뭉글뭉글 심장 한가운데서 퍼져나가 너를 잠 못 이루게 하거나 너를 집에 돌아오지 못하게도 할 것이며 어쩌면 바람을 일으켜 우산을 뒤집을 수도 있을 것이다.

주황은 실제의 색이 아니라 차라리 정신적인 색이다.
주황은 독특한 에너지를 품고 있기도 해 소량의 독을 퍼뜨린다.
네가 사랑에 빠졌다면 너의 머리는 온통 이 주황색 물감으로 가득 찰 것이며 그 사랑에 빠진 네가 손을 뻗기만 하면 세상 모든 사물들이 주황으로 물들어버릴 것이다. 사랑이 시작됨과 동시에 방망이처럼 닥치는 색, 그 몸살의 색이다.
그 몸살을 이용해 허풍을 부풀리고, 단단히 과시를 부풀리고 또한 네 감정 모두를 끈적하게 포장하기도 할 테니 조심할 밖에.
이제 조금 알겠나. 우리가 얼마나 주황의 물감을 많이 사용하면서 사는지를.
- 이병률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네가 골라놓은 당근을 먹었다' 중 일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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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P를 만나는 날마다 점퍼 스타일의 파카를 주로 입고 나가 어제는 작정하고 설빔 겸 오렌지색 코트를 입고 나갔다.
"아! 오는데 영주인 줄 알겠더라. 실루엣도 그렇고 우선 색깔이..."
ㅋ! 원래 눈에 띄는 좀 화려한 색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요즘은 차분해지고 싶어서 아주 가끔 분위기 전환할 때만 입긴 하는데 P가 잘 어울린다며 "아무나 소화하기 힘든 색인데." 해주었다.

P는 늘 카키나 짙은 벽돌색의 코르덴 남방, 체크무늬 갈색 남방, 그리고 검은색 조끼에 청바지, 코르덴바지나 면바지에 머플러를 멋스럽게 두르고 나온다. 외투는 그리 두껍지 않은 검은색 코트나 캐주얼 짙은 감색 트렌치코트를 주로 입는데 엊그제 날씨 풀렸을 때는 지루하다며 카키색 재킷을 입고 나왔다.

무채색을 즐겨 입는 그와 칼라플한 색상을 즐겨 입는 나, 훌쩍 큰 키의 그와 작은 키의 나.
외형만을 보면 정말 언발란스한데 , 그 다름이 싫지 않고 조화롭게 느껴진다. 그리고 조금씩 그와 닮아지는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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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당신을 질투함으로써 좋아하기로 한다. 당신의 아름다움이, 당신의 눈부심이 나를 그렇게 가난하게 한다. 사랑하면서도 이토록 가난한 것은 당신이 나를 미워하는 것보다도 무섭다. -이병률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네가 골라놓은 당근을 먹었다'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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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는
"주황은 결핍의 색이 아니야. 오히려 즐겨 쓰고 싶어 지는 의욕의 색깔 같지 않니? 무시해. 누군가 결핍의 색이라고, 갈증의 색이라고 했다 해도." 라며
스타카토식으로 단호하게 내뱉고는 물끄러미 내 코트를 받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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