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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린혜원 Oct 21. 2020

사랑은 어쩌면 대단히 이기적인 것이니..

편지, 딸에게

체실 비치에서’라는 영국 영화를 보았단다. 우리는 안타깝게도 대다수의 허리우드 영화문법이 의식을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지만, 엄마는 외국 영화들 중에선 영국이라든지 덴마크 혹은 독일의 영화처럼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법으로 삶을, 사랑을, 혹은 존재 자체에 대한 질문을 툭! 하고 던지는 유럽 영화들을 자주 감상하곤 해.


다소 난해하고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장면, 장면 사이의 호흡은  '킬링 포인트' 이자, ‘힐링 포인트’ 같기도 하고. 그 영화들을 볼 때면 가슴이 좀 찌르르~하다고나 할까? 아무튼.


오늘 우연히 선택하게  이 영화가 어쩐지, 결혼 생활 27년을 맞은 엄마에게는 특별한 메시지를 품은 것처럼 보이더라.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여행을 떠난 시점부터 마지막 장면인 그로부터 45년 후까지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이야기 얼개는, 너무나 슬프면서도 무게감 있게 다가오더구나.


 ‘사랑’이란 개념, 그저 서로 이해하고 나누고 끝없이 희생하는 것이라 여기는 사람들에게, 영화는 내내 ‘당신은 정말 사랑이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라는 진지한 질문을 여러 차례  던졌단다.


분노조절장애가 있어 보이는 남자는, 여자가 차마 끄집어내지 못하는 아픔을 이해하기보다는 ‘결혼’ 이 허락한 관계의 테두리를 벗어나 이야기하는 여자의 태도를 탓하고, 더해 질책하더니 결국은 불과 6시간 만에 결혼에 종지부를 찍어 버렸지.


여자는 그런 그를 또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고. 클래식을 사랑하고 연주하는 것이 일상인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여자와, 척 베리나 엘비스 프레슬리에 심취하고 꽃과 나무와 새의 이름을 빠짐없이 외우고 있는,  태생이 평범하다 못해 촌스런 남자의 접점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은 듯도 보였단다. 그들은 대체 왜 서로의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고민할 시간도 갖지 않은 채 결혼이라는 틀에 스스로 갇히고자 했을까?




사람들은 자신과 전혀 다른 결을 가진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고 끌리기도 하잖아.-어쩌면 이런 끌림이 있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짝을 찾고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 안주할 수 있는 건지도!- 우리가 흔히 사랑이라 착각을 하고 맹신해 버리는 그 불같은 감정은 안타깝게도 유효기간이 너무 짧은 것이어서, 그 시간들이 지나가 버린 후에 오는 상실감을 대체해 줄, 무엇인가를 빨리 알아채는 것이 관건일 거야. 지속성에 있어선.


얼마 안 있으면 엄마, 아빠 결혼 27주년 기념일이지? 시와 예술을 사랑하고, 고즈넉한 산사로 닿는 길을 자박자박 걷고  혼자만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여자-엄마와, 너무 빽빽해서 숨 막힐 것 같은 사람의 숲에서 호흡하고 부대끼는 걸 좋아하고,  오로지 오늘에만 흠뻑 취해 사는 남자-아빠,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방법을 무수한 시행착오를 통해 익혔기에, 전쟁 같은 나날들 속에서도 끝끝내 이렇게 함께 살아가고 있구나. 그리하여,


결혼이, 부부라는 관계가, ‘나- 자신’ 보다 더욱 소중한 무엇이라는 생각을 애초부터 버리고 살아야 편해진다!

엄마가 27년의 결혼생활을 통해 얻은 지혜라면 지혜겠구나. 이기적이되, 다만 합리적일 것.

또한 빠트리면 안 될 첨언이고. ! 마지막으로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 하나 덧붙일게.


서툴러서 서로에게 상처만 가득 안긴 신혼 여행지

체실 비치에서 , 여자는 남자에게 "돌아가자, 둘이 같이"라고 말했지. 그것이 마지막 대화였고 그들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어. 마치 둘이 만난 처음의 그 순간부터 예정돼 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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